‹ 목록으로 다시 태어났더니 구원자였다

4화

겨울이 다시 왔다. 서준의 방 안엔 촛불 하나 없이도 늘 환했다. 캔버스에서 뿜어나오는 붉은 색이 방 전체를 물들였기 때문이다. 벽지에도, 천장에도, 서준의 뺨에도 그 붉은 기운이 옮아 있었다. 창밖은 이미 눈이 쌓이기 시작했지만 방 안의 온도는 그와 무관하게 느껴졌다. 소하가 나타난 지 십일 년째였다. 다섯 살 무렵 처음 마주친 그녀는 여전히 같은 얼굴, 같은 머리카락, 같은 옷자락을 하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파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서준을 향했다. 변한 것은 서준 쪽이었다. 키가 자랐고, 목소리가 낮아졌고, 손끝은 갈라졌다. 열여섯 소년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지만 소하는 시간의 바깥에 있는 사람 같았다. 그 사실을 서준은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 여겨야 할 것들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손목시계는 헐거워진 지 오래였다. 아버지가 사준 그 시계는 이제 그의 가는 팔목 위에서 헛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시계를 건네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에겐 짧고, 어떤 사람에겐 길다. 네가 어느 쪽인지는 네가 정하는 거야.' 서준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시계가 헛돌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손목을 조금 더 세게 조였다. "밥 먹었니." 한소영이 방문을 열며 물었다. 목소리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네." 서준이 짧게 답했다. 먹지 않았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한소영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턱에 서서 방 안을 훑었다. 이불은 아침에 그대로였고, 밥그릇은 사흘째 부엌 개수대에 놓인 채였다. 그녀는 그것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들의 방에 들어설 때마다 그녀는 늘 같은 자리에 시선을 멈췄다. 텅 빈 밥그릇도, 흐트러진 이불도 아니었다. 캔버스 위, 붉은 머리를 늘어뜨린 소녀의 그림이었다. 그림 속 소녀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실제로 창가에 앉아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한소영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눈엔 텅 빈 창틀만 보였다. '저 아이는 누구일까.' 그녀는 매번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물으면 아들이 더 멀어질 것 같았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지금보다 더 멀어지는 것. +++ 병원은 여전히 무기력했다. 대기실 의자는 딱딱했고, 형광등은 미세하게 깜빡였다. 서준은 그 깜빡임을 세다가 그만두었다. 세는 것조차 의미가 없었다. "검사 결과는 정상입니다." 의사가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목소리엔 지친 기색이 섞여 있었다. 벌써 세 번째 병원이었고, 세 번째로 듣는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는 겁니까." 한소영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애 손끝이 저렇게 갈라지고, 밥을 안 먹고, 잠도 제대로 안 자는데 정상이라니요." "수치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의사가 안경을 고쳐 썼다. "환자분 스스로 뭔가에 몰두하고 있다면, 그게 원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서준을 힐끗 보았다. 서준의 손끝, 갈라진 그 자리를 눈으로 훑고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정신과 상담을 다시 권해드립니다. 이전에도 권했었죠." "상담은 받았어요. 벌써 두 번이나." 한소영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런데도 나아지질 않으니까 드리는 말씀이에요." 의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그럼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시죠. 성장기니까요." 성장기, 라는 말이 서준에겐 낯설게 들렸다. 그는 소파 끝에 걸터앉아 자신의 손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끝은 여전히 갈라져 있었다. 붓을 쥐는 자리마다 살갗이 터서 옅은 핏기가 배어 있었다. '몰두하는 게 아니라, 지켜야 하는 겁니다.' 그는 속으로만 그렇게 답했다. 의사에게도, 어머니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병원을 나서는 길,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한소영이 아들의 팔을 붙잡았다. 손끝에 힘이 실려 있었다. "서준아. 엄마한테 말해줄 수 없니. 뭐가 널 이렇게 만드는지." 서준은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등엔 잔주름이 늘어 있었다. 예전에는 없던 것들이었다. 그녀도 늙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서준의 가슴 어딘가를 찔렀다. "말해도, 이해 못 하실 거예요." 그가 말했다. 짧고 단정한 어조였다. 한소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뭔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들의 표정에서, 더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읽었기 때문이다.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서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소하에 대해 말하는 순간, 어머니는 그를 병원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한소영의 옆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서준은 그 얼굴을 흘끗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 밤이 깊었다. 서준은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붓끝이 물감을 머금기도 전에 손끝에서 먼저 붉은 것이 흘러나왔다. 스륵- 붓이 캔버스를 스치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다른 소리는 없었다. 시계 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방 전체가 그 붓질에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창가엔 소하가 있었다. 늘 그렇듯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였다. 서준은 그 자세를 십일 년간 봐왔다. 처음엔 낯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당연했고, 지금은 그게 없으면 오히려 불안했다. "오늘은... 그만 그릴까요." 서준이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 소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파란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서준은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눈꺼풀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고, 시선이 잠깐 서준의 손끝에서 벗어나 창밖을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준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십일 년간 그녀만을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변화였다. '왜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 걸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하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있는 한 너는 혼자가 아니다.' 그 한마디가 십일 년을 지탱해온 기둥이었다. 다섯 살의 서준은 그 말을 들으며 처음으로 밤에 무섬을 타지 않았다. 그전까지 그는 어둠 속에서 늘 혼자였다. 아버지는 이미 없었고,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소하가 나타난 뒤로 밤은 더 이상 무서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그녀는 자주 이런 표정을 지었다. 마치 죄를 짓고 있는 사람처럼. 서준은 그 표정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묻고 싶었지만 매번 묻지 못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하님." 서준이 붓을 내려놓았다. "혹시... 저 때문에 힘든 일이 있으신가요." 소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무언가 말하려다 삼킨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대신 손을 뻗어 서준의 손끝을 향해 다가왔다. 서준은 그 손이 닿기를 기다렸다. 늘 그랬듯 따뜻할 거라고 생각했다. 십일 년간 그녀의 손끝은 항상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 온기가 서준에게는 유일한 위로였다. 그러나 손끝이 맞닿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훅-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지.' 그는 순간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눈앞이 잠깐 흐려졌고,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무언가가 몸 안에서 급격히 빨려나가는 감각이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감각이었다. 소하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표정이 이전과 달랐다. 놀람과 죄책감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파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고, 입술이 잘게 떨렸다. "미안하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처음으로 서준에게 사과한 순간이었다. 십일 년 동안 소하는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위로했고, 지켜봤고, 곁에 있었지만 사과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 한마디가 서준의 귀에는 유난히 낯설게 박혔다. 서준은 그 말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했다. 다만 손끝이 유난히 시렸다는 것만 기억에 남았다. 붓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마치 얼음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저렸다. 그는 그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온기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도윤이 방문을 벌컥 열었다. 쾅- 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형! 오늘도 안 나와?" 이도윤이 뛰어들며 물었다. 열 살이 된 도윤은 여전히 밝고 장난스러웠다. 잠옷 차림에 양말도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 "...나중에." 서준이 캔버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형은 항상 나중이래." 도윤이 입을 삐죽였다. "피아노 쳐달라고 한 지가 벌써 몇 달째야. 엄마는 바쁘고, 형은 방에만 있고. 나 진짜 심심하단 말이야." 도윤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캔버스에서 뿜어나오는 붉은 색이 그의 눈에도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열 살 아이의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저 그림, 계속 그거만 그려? 이제 다른 것도 그려봐. 나 그려줘, 형." 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붓끝이 캔버스 위를 지나가는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도윤이 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발을 돌렸다. 그 어깨가 살짝 처진 것을 서준은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서준은 잠시 붓을 멈췄다. '나중에라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런 물음이 처음으로 마음속에 떠올랐다. 도윤이 태어났을 때 서준은 이미 소하와 함께였다. 동생을 안아준 기억도, 함께 놀아준 기억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사실이 지금에서야 무겁게 다가왔다. 하지만 창가의 소하를 돌아보는 순간, 그 물음은 곧 흐릿해졌다. 그녀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란 눈동자, 흔들림 없는 시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서준은 그렇게 믿었다. 십일 년간 그렇게 믿어왔고, 그 믿음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손끝뿐 아니라 발끝에서도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이불을 두 겹으로 덮었는데도 발끝이 시렸다. 손끝의 저림은 이제 손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마치 몸의 온기가 아주 조금씩, 어딘가로 새어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서준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눈앞에 가져다 댔다. 손끝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핏기가 빠진 것처럼. '설마.' 그는 그 생각을 애써 지웠다. 지워야 했다. 소하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리 없었다. 십일 년간 그녀는 오직 그를 지켜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방 한구석,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소하의 눈빛은 그날 이후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의 이유를, 서준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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