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혼녀와의 야근

4화

"아, 맞다. 재현 씨가 이거 물어보라고 했는데." 서연이 갑자기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창밖으로는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그칠 기미도 없이 부슬부슬 이어지고 있었는데, 사무실 안의 형광등 불빛이 그 흐린 날씨를 조금이나마 밀어내려 애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혼식 축가, 도윤 씨가 불러줄 수 있냐고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그 순간 목구멍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마시고 있던 커피잔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렸다. "제가요?" 나는 애써 담담하게 되물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나는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시간을 벌었다. "네, 재현 씨가 도윤 씨 노래 잘한다고 어디서 들었나 봐요. 저번에 회사 워크숍 때 노래방에서 불렀던 거, 제가 얘기했거든요." 서연이 별생각 없이 덧붙였고, 나는 그 말에 왜 재현이 나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지, 그리고 왜 서연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그렇게 자세히 전했는지, 그 두 가지 사실이 동시에 마음에 걸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내 이름이, 내 목소리가, 내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오르내리고 있었다는 것이. "그때 진짜 잘 부르셨잖아요. 다들 놀랐거든요? 그냥 조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노래방 마이크 잡으니까 완전 딴사람 같았다고, 재현 씨한테도 그렇게 말했어요." 서연이 그때 기억이 떠오른 듯 살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 웃음을 마주 보면서도,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볼게요." 나는 짧게 답했다. 서연은 그런 내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다시 휴대폰을 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재현 씨가 진짜 도윤 씨 좋아해요. 저번에 셋이 술 마셨을 때도 그랬잖아요, 도윤 씨랑 진짜 잘 맞는다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순수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고, 나는 그 기대감이 나를 향한 게 아니라 그와 나의 관계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이 씁쓸했다. 그날 술자리가 문득 떠올랐다. 재현이 내 잔에 술을 채워주며 형, 저랑 진짜 잘 통하는 것 같아요, 라고 말했던 순간과, 그 말을 들으며 어색하게 웃었던 내 표정과, 그리고 그 옆에서 그런 우리를 흡족하게 바라보던 서연의 얼굴까지. 그 셋이 함께 있던 자리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도 지금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재현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나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스스로도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 사람의 결점을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뒤섞여 있었던 것 같다. 서연은 잠깐 생각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음, 다정하고... 배려심 많고, 저한테 화 한번 안 내요. 근데 가끔은 그게 답답할 때도 있어요. 뭘 물어봐도 다 괜찮다고만 하니까, 진짜 속마음을 모르겠다는 느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나는 그 웃음 속에 작은 균열이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예를 들면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캐묻고 싶었는지, 나조차 설명하기 어려웠다. "음... 신혼여행지 정할 때도, 결혼식장 고를 때도, 다 저 좋은 대로 하래요. 처음엔 그게 배려인 줄 알았는데, 요즘엔 그냥... 관심이 없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손끝으로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그 작은 습관이, 그녀가 뭔가를 숨기고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결혼하기로 했어요?" 나는 결국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던졌다. 사무실 안이 잠깐 조용해졌고, 서연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답했다. "어쨌든... 안정적이니까요. 이 사람이면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랑이 뭐 별거 있나요, 편안한 게 최고죠." 그녀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나는 그 말속에서 그녀 스스로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편안함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나는 목 끝까지 끌어올렸지만 결국 삼켜버렸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동료로만 남을 수 없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그 말을 한다면, 서연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랄까, 아니면 화를 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조용히 웃으며 넘겨버릴까.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을 거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나는 그저 노래를 잘 부르는 동료, 축가를 불러줄 사람, 재현과 잘 맞는 사람일 뿐이었으니까. "부러워요, 그런 확신이." 나는 결국 그렇게만 답했다. 겉으로는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그 확신이라는 것이 사실은 서로에 대한 뜨거운 감정이 아니라 그저 안정을 향한 타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애써 밀어내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자 서연은 잠깐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그러다 이내 시선을 내리깔며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확신... 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긴 한데."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요. 도윤 씨는 그런 거 없어요? 흔들리는 거 지겨워서 그냥 안정적인 걸 택하고 싶은 그런 마음."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 질문이 마치 나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는데, 그녀가 그런 의도로 물은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잠깐 대답을 미뤄야 했다. "있죠, 저도." 나는 겨우 그렇게 답했다. 그 대답이 얼마나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지, 서연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서연은 내 대답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화제를 돌리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녀의 구두 굽이 바닥을 딱딱 두드리는 소리가 잠깐 사무실을 채웠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비가 진짜 안 그치네요." 그녀가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회색빛 하늘 아래로 빗줄기가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바라보며,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깨선이 곧고 단정한 그녀의 뒷모습에서, 나는 문득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재현이라는 이름이 우리 사이에 놓인 벽처럼 느껴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벽은 그녀가 쌓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했던 것이었고, 나는 그저 그 벽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축가를 불러달라는 부탁조차, 어쩌면 그 벽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그 노래를 부르는 날,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축가를 부르며 웃고 있을 나를 상상하자, 속에서 뭔가가 서걱거리며 갈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상상은 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그려버린 뒤였다. 그때, 콰르릉— 하는 요란한 천둥소리가 사무실 전체를 흔들었다. 그 소리는 이전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가까웠고, 동시에 사무실의 조명이 한번 크게 흔들리며 깜빡였다. 벽에 걸린 액자가 살짝 기울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고,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몇 장이 바람에 팔락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연이 놀라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자리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탁!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조차 신경 쓸 겨를 없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아요?" 내가 다가가며 물었을 때, 서연은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창가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는데, 그 표정이 평소의 밝고 자신감 있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굳어 있었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동자는 창밖의 어둠을 향한 채 초점을 잃은 듯했다. "서연 씨?"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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