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혼녀와의 야근

1화

빗줄기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밤이었다. 15층 사무실에는 나와 이서연, 단둘뿐이었고, 나머지 팀원들은 이미 퇴근한 지 오래였는데도 우리는 다음 주 광고주 프레젠테이션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한 채 각자의 모니터를 마주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번개가 한 번씩 번쩍였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고, 그 사이사이 낮게 우르릉대는 천둥소리가 사무실 벽을 타고 울렸다. 형광등 하나가 유독 낮게 웅웅거리며 깜빡이는 통에,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들어 그 불빛을 노려보다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에어컨은 이미 꺼진 지 오래였지만 습기 찬 공기가 사무실 안을 무겁게 채우고 있었고, 그 사이로 커피 자국이 말라붙은 종이컵 몇 개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서연의 결혼 발표를 떠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지난주 팀 회식 자리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와 소주 냄새가 뒤섞인 그 좁은 고깃집 구석에서, 그녀가 잔을 들고 "저 다음 달에 결혼해요"라고 말했던 순간을. 그 말이 끝나자마자 팀장이 박수를 쳤고, 팀원들이 우와, 소리를 지르며 잔을 부딪쳤는데, 나는 그 소란 속에서 한 박자 늦게 잔을 들었던 것 같다. 애써 웃으며 축하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뭔가가 툭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고, 집에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창에 머리를 기댄 채 그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곱씹었다. 저 다음 달에 결혼해요. 결혼해요. 그날 이후로 서연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그녀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먼저 확인하게 되었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스스로가 한심해서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대체 뭘 확인하려는 건데. 이미 정해진 일인데. "강도윤 씨." 서연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모니터 너머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는데, 화장이 조금 지워진 얼굴에 피곤함이 배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눈은 여전히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목에 걸린 사원증 줄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고, 늘어진 셔츠 소매 끝에는 오늘 하루 종일 붙잡고 있었을 볼펜 잉크가 살짝 묻어 있었다. "이 카피, 어때요? 너무 촌스러운가." 그녀가 화면을 나에게 돌려 보여주며 물었고,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자리로 다가갔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괜찮은데요." 나는 짧게 답했다. 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에이, 그냥 하는 말이죠? 도윤 씨는 맨날 다 괜찮대요, 그거 알아요?"라고 되물었고, 나는 그 표정이 예전과 똑같다는 생각에 잠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그녀의 카피를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까지도 서연다웠으니까. 다만 그 마음이 카피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걸, 나는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진짜예요. 이 문장, 여기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까'—이 부분이 좋네요." 나는 화면 속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덧붙였고, 서연은 그제야 만족한 듯 어깨를 펴며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창밖에서 번개가 한 번 더 번쩍였고, 곧이어 쿠르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사무실 유리창을 흔들었다. 서연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게 보였지만,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을 못 본 척하며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서연은 어릴 때부터 천둥소리를 유난히 무서워한다고, 언젠가 술자리에서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고 마음속 어딘가에 조심스레 접어 넣어두었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불쑥 꺼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서연을 처음 만난 건 3년 전, 이 회사에 신입으로 입사한 첫날이었다. 그날 나는 낯선 사무실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고, 어디에 가방을 놓아야 할지, 누구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복도 한가운데에서 서류를 품에 안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서연이 다가와 "저기, 자리 안내 못 받으셨어요?"라며 웃어 보였을 때, 나는 그 웃음이 이상하게 오래 남을 거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녀는 그날 나를 자리로 안내해주고는 사내 시스템 사용법이며 팀 회식 문화까지 조잘조잘 설명해주었고, 나는 그 말들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그날부터 우리는 같은 팀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나는 그녀가 야근할 때마다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사다 주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녀는 내가 실수할 때마다 대신 변명해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번은 내가 광고주 앞에서 숫자를 잘못 말해 분위기가 얼어붙었을 때, 서연이 아무렇지 않게 "저희 팀 표기 오류가 있었네요, 죄송합니다"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준 적도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려다가 결국 캔커피 하나를 그녀 책상 위에 슬쩍 올려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관계가 3년 동안 이어지는 사이, 나는 내 감정이 어느 순간부터 동료 이상의 것이 되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연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나는 편하고 믿을 수 있는 동료였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언젠가 회식이 끝나고 둘이 나란히 버스를 기다리던 밤, 그녀가 "도윤 씨는 진짜 편해요. 오빠 같기도 하고"라고 웃으며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아프게 들렸는지 그때는 설명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이미 그녀가 나를 어디까지 두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비가 진짜 많이 오네요." 서연이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봤고, 도시의 불빛이 빗물에 번져 흐릿하게 흔들리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에 부딪힌 빗방울들이 아래로 길게 줄을 그리며 흘러내리는 게 마치 누군가 손톱으로 긁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날은 집에 일찍 가고 싶은데." 그녀가 덧붙였고, 나는 "그럼 이거 마무리하고 얼른 가죠"라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이 밤이 조금 더 길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스치고 지나갔다는 걸,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이 사무실 안에, 이 빗소리 안에, 우리 둘만 갇혀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을. 삑— 그때 서연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가 화면을 확인하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재현 씨네요"라고 말했고, 나는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손끝이 미묘하게 굳는 걸 느꼈다. 박재현. 서연의 약혼자.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이미 뭔가가 조용히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화면 속 카피 문장들이 갑자기 아무 의미 없는 글자들의 나열처럼 보였다. "먼저 자냐고 물어보네요." 서연이 웃으며 답장을 보내는 사이, 나는 그녀의 옆얼굴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타이핑하는 손가락의 움직임, 화면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눈동자,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까지도. 그 웃음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자꾸 그 표정에 마음이 흔들리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대답을 입 밖으로도, 심지어 마음속에서도 완전한 문장으로 만들지 않으려 애썼다. 창밖의 빗소리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고,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이 서연의 책상 위 서류 몇 장을 살짝 들썩이게 했다. 그녀는 그것도 모른 채 여전히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 순간 왜인지 이 사무실의 불빛이 유난히 위태롭게 느껴졌다. 나는 그 소리가 오늘 밤 우리 사이의 무언가를 예고하고 있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예감을 애써 지워내며 다시 자료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데... 왜 자꾸 심장이 이상한 방향으로 뛰는 걸까. 나는 그 물음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모니터 속 커서가 깜빡이는 것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