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잔고 무한, 낮에는 노가다

4화

3주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낮엔 현장, 밤엔 각본. 새벽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가 두세 시간 눈을 붙이고 다시 안전모를 썼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벽돌을 나르다가 순간적으로 손끝이 저려오는 걸 느낀 적도 있었다. 잠을 줄이고 밥을 줄였다. 몸무게가 줄고 눈 밑이 꺼졌다. 반장은 계속 잔소리를 했다. "야, 너 요즘 얼굴이 왜 그래. 밥은 챙겨 먹고 다니냐?" "네, 챙겨 먹어요." 거짓말이었다.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로 하루를 버틴 날이 절반이었다. 반장은 못 믿겠다는 눈으로 나를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 "몸 상하면 니만 손해다. 인마." 나는 그냥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대답은 쉬웠다. 지키는 게 어려웠을 뿐이다. 접수 마감 전날, 원고를 마지막으로 다시 읽었다. 세 번, 네 번. 문장 하나를 붙잡고 고치고,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 그러다 결국 시간이 없어 그냥 눈을 감고 시스템 알림을 열었다. [제출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제출하시겠습니까?] 확인을 눌렀다. 심장이 뛰었다. 손가락 하나가 이 3주를, 아니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쌓아온 모든 걸 결정짓는 것 같았다. 몇 초 후 답이 왔다. [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1차 심사 결과는 2주 후 발표됩니다.] 2주. 숫자로는 짧았지만 체감으로는 한 달 같았다. 그 사이 나는 계속 현장에 나갔다. 벽돌을 쌓으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심사 생각뿐이었다. 삽질을 하다가도 갑자기 대본 속 대사 한 줄이 떠올라 손을 멈추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삽을 들었다. 결과 발표일, 나는 일부러 아침부터 평소보다 더 긴장한 채 현장에 나갔다. 손에 쥔 벽돌이 유난히 무거웠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컨테이너 뒤로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그늘을 찾아 휴대폰을 열었다. 별빛엔터테인먼트 사이트에 접속했다. 로딩되는 몇 초가 억겁처럼 느껴졌다. 명단이 떠 있었다. 백 개가 넘는 이름들. 나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내리며 내 이름을 찾았다. 없었다. 한 번 더 확인했다. 위에서부터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듯 훑었다. 없었다. 세 번째로 확인했다. 혹시 자간이 이상해서 못 봤나, 혹시 오타가 있나 하는 마음으로 검색창에 직접 내 이름을 쳐봤다. 검색 결과 없음이라는 문구만 떴다. 여전히 없었다. 속이 뒤틀렸다. 3주 동안 잠도 안 자고 쓴 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휴대폰을 쥔 손이 떨렸다. 컨테이너 벽에 등을 기대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결과: 1차 심사 탈락] [탈락 사유: 소재의 신선도 부족, 캐릭터 입체감 미흡] 소재의 신선도 부족. 전생에서는 그렇게 신선했던 이야기가, 이 세계에서는 이미 어디선가 다 써먹은 이야기였던 걸까. 아니면 내가 그냥 완전히 잘못 짚은 걸까. 머릿속으로 그 대본의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되짚어봤다. 어디가 낡았다는 건지, 어디가 부족했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심사평 전문을 어떻게든 구해다 읽었다. 커뮤니티 게시판을 뒤지고, 별빛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 공지사항까지 다 파고들었다. 몇몇 심사위원의 짧은 코멘트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설정, 익숙한 갈등. 요즘 시청자는 이런 이야기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 문장이 가슴을 후벼팠다. 전생에서는 명작으로 불렸던 구조가 여기서는 그냥 낡은 클리셰였다. 세계가 다르니 트렌드도 달랐다. 내가 알던 방정식이 이 세계에는 안 맞는 부분이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별빛엔터테인먼트 근처를 직접 찾아갔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 건물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내가 떨어진 곳이 어떤 곳인지 확인하고 싶었달까. 건물 밖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봤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 노트북 가방을 멘 사람들, 다들 뭔가 확신에 찬 걸음걸이였다. 나만 이 거리에서 붕 뜬 존재 같았다. 로비 안쪽으로 몇 걸음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안내 데스크 직원이 나를 한번 쳐다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최종 계약된 게 그 작가님이시죠? 방송국에서 벌써 세 편이나 편성 받으신 분." "네, 이번에 신인 몇 명 데려간다고 하는데, 다들 등단 경력이 다 있더라고요. 습작 몇 년씩 한 사람들." "확실히 요즘은 그냥 열정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데이터 보는 눈도 있어야 하고." 등단 경력. 습작 몇 년. 데이터 보는 눈. 나는 뭐가 있었나. 전생의 기억뿐이었다. 그것도 방송가에서 직접 일한 게 아니라 그냥 옆에서 구경만 한 경험이었다. 카메라 뒤에서 대본을 훔쳐본 게 전부였지, 이 판을 직접 굴려본 적은 없었다. 건물을 나서면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근처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캔맥주를 하나 땄다. 열아홉짜리 몸으로 마시면 안 되는 거였지만, 그날은 그냥 마셨다. 알콜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유난히 쓰게 느껴졌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혼잣말이 나왔다. 자조적인 웃음이 섞였다. 죽어서 다시 태어났는데, 여전히 나는 벽 앞에서 무릎을 꿇는 놈이었다. 총에 맞아 죽던 그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어두운 골목, 차가운 아스팔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하늘 한 조각. 그때도 나는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얼마나 얕았는지, 이번 생에서도 똑같이 증명되고 있었다. 캔을 다 비우고 나니 손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시스템은 그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림도, 경고도 없었다. 마치 나를 놓아준 것처럼, 그냥 조용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뭐라도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실패했으니 다시 하라든가, 방향이 틀렸다든가. 그런데 아무 반응도 없다는 건, 이게 그냥 내 몫의 실패라는 뜻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현장에 나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한소라였다. "오빠, 저 지금 통화 좀 돼요?"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평소의 밝은 톤이 아니었다. 전화기 너머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같은 게 섞여 들렸다. "무슨 일이에요?" "저희 마카롱 사업, 투자받는다고 했던 거 있잖아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사기꾼이었나 봐요. 돈만 받고 사라졌어요." 숨이 멎었다. "얼마나요?" "삼천만 원요. 저희 전세보증금까지 다 끌어다 넣은 거였어요." 삼천만 원. 그리고 전세보증금. 전화기 너머로 한소라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박선영이 옆에서 뭐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목소리가 잦아들었다가 다시 커졌다가, 두 사람 다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경찰에는 신고했어요?" "신고했는데, 그 사람 연락처도 가짜고 사무실 주소도 가짜였대요. 계좌도 이미 다 빼갔고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에겐 무한 자금 시스템이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삼천만 원 정도, 아니 훨씬 큰 돈도 당장 만들어낼 수 있었다.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시스템의 규칙이 떠올랐다. [임무: 합법적 소득 구축] [경고: 부당하게 취득된 자산으로 판단될 경우 즉시 소멸합니다.] 지금 당장 이 시스템을 써서 돈을 내밀면, 그 출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열아홉짜리 건설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삼천만 원을 손에 쥐고 있다는 걸, 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한소라와 박선영이 그냥 넘어가 줄 리 없었다. 둘 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었다. "오빠, 어떻게 해요. 저희 이제 진짜 끝난 것 같아요." 한소라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도와야 했다. 그런데 도우면 정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안 도우면, 이 관계가 여기서 끊어질 수 있었다. 저울질이라는 게 이렇게 잔인한 거였나 싶었다. 전화기를 든 손이 떨렸다. 시스템이 다시 알림을 띄웠다. [경고: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 감지되었습니다.] [해당 선택은 정체 은폐 지수에 영향을 미칩니다.] 선택. 나는 지금 그 앞에 서 있었다. 심사에서 떨어진 다음 날, 가장 정신적으로 바닥인 상태에서, 또 다른 무게가 얹혔다. 대답을 미룬 채, 나는 그냥 전화기를 귀에 대고 아무 말도 못한 채 서 있었다. 한소라의 흐느낌만 계속 이어졌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