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골짜기의 하늘이 어느새 붉게 물들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 노을빛이 마치 핏물을 풀어놓은 듯 눈 덮인 봉우리마다 스며들어 골짜기 전체를 처연한 빛깔로 물들이고 있었으며, 이무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기운이 바로 그 노을빛 아래에서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옅어지는 것을 오직 이신만이 유일하게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그저 저녁 빛에 눈이 어른거리는 것이라 여겼으나, 아버지의 옷깃 끝에서 흐르던 기의 파동이 점점 성긴 실오라기처럼 풀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이신은 등줄기에 서늘한 예감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현진도장은 짐짓 밀리는 척 물러서며 시간을 끌었을 뿐, 애초부터 정면으로 이무한과 승부를 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이제야 명백해졌다. 그의 검끝은 몇 번이나 이무한의 요혈을 스치듯 지나갔으되 결코 깊이 파고들지 않았으며, 그것이 실력의 부족함이 아니라 계산된 유예였다는 사실을, 골짜기를 물들이는 노을빛만큼이나 뒤늦게 이신은 깨달았다.
"이 무공에는 한계가 있음을, 노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소."
그가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처럼 골짜기의 정적을 갈랐고, 이무한의 안색이 그 말과 함께 눈에 띄게 흔들렸다. 지금껏 태산처럼 버티고 있던 그의 두 다리가, 이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근원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는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회천귀원공의 기세가 다하는 순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검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잦아들며 이무한의 두 다리가 휘청거렸고, 방금 전까지 태산처럼 굳건하던 그의 몸이 마치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는 손끝에 남은 마지막 진기를 모아 다시 검을 세우려 했으나, 이미 혈맥을 타고 흐르던 기운은 모래시계의 마지막 알처럼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버님!"
이신이 다급히 외쳤으나, 그 목소리가 채 닿기도 전에 현진도장의 검이 새하얀 궤적을 그리며 이무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치 겨울 하늘을 가르는 유성처럼, 그 검은 어떠한 자비도 남기지 않은 채 곧고 정확하게 뻗어 들었다.
푹!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무한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붉은 피가 눈밭 위로 흩뿌려졌다. 새하얀 눈 위에 피어난 그 붉은 자국은, 마치 겨울에 홀로 핀 동백처럼 처연하면서도 선명했다. "아버님!" 이신이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아버지에게로 달려들었으나, 이미 이무한의 낯빛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손끝이 이신의 옷깃을 붙잡으려는 듯 허공을 몇 번 더듬다가, 마침내 아들의 손을 찾아 힘겹게 붙들었다.
"신아…… 살아야 한다……."
이무한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아들의 손을 붙잡으며 내뱉은 한마디는, 그 어떤 무공의 구결보다도 무겁게 이신의 가슴에 박혀들었다. 그 목소리는 이미 숨이 넘어가는 사람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또렷하여, 이신은 그것이 아버지가 평생을 걸쳐 남긴 마지막 유언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이신의 몸속에서 각성한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은 지존광계의 기운이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온몸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진기가 마치 성난 파도처럼 날뛰었으니, 그것은 각성이라기보다 차라리 폭발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골짜기의 나뭇가지들이 그 기세에 못 이겨 우수수 흔들렸고, 쌓여 있던 눈이 허공으로 흩날리며 마치 눈보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듯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이건 또 무슨……."
현진도장이 처음으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뒷걸음질을 쳤다. 방금 전까지 승리를 확신하던 그의 얼굴에는 이제 옅은 두려움의 그림자가 스치고 있었으니, 평생을 두고도 본 적 없는 기운이 한 어린 자식의 몸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신의 몸을 감싼 흰빛이 골짜기 전체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며, 그 안에서 이신은 태어나 처음으로 살기라는 감정에 완전히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의 정신은 오히려 그 냉기 위에서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한편 그 시각, 흑암산에서 수백 리 떨어진 어느 은밀한 전각에서는 붉은 머리에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내가 찻잔을 기울이며 흑암산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하늘이 펼쳐져 있어, 별빛이 이미 짙게 내려앉은 그 밤하늘 아래 그의 표정은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 그가 바로 이 모든 함정을 설계한 만현천이었으며, 그의 곁에는 금발의 준수한 청년이 가부좌를 튼 채 온몸에서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공교롭게도 그 청년, 만임천 또한 바로 이 순간 지존광계의 기운을 각성하고 있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옅은 김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갈 때, 만현천의 입가에는 기이한 미소가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아비의 재능을 넘어서겠다더니, 과연 오늘이 그날이로구나."
그가 낮게 읊조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는 지극히 작았음에도, 마치 전각 전체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흑암산의 절규와 만리 밖의 각성이 같은 하늘 아래 겹쳐지는 그 순간, 강호의 오랜 균형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두 개의 흰빛이, 서로 다른 하늘 아래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타오르고 있었으되, 그것이 언젠가 하나의 운명으로 얽히리라는 것을, 아직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