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버지, 원수는 갚겠습니다

1화

흑암산(黑巖山)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천마세가(天魔世家)의 연무장에는 이른 새벽부터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는데, 아직 해가 온전히 떠오르지 않은 하늘은 짙은 남빛에서 서서히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그 어스름 속에서 가부좌를 튼 이신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아버지이자 세가의 가주인 이무한은 팔짱을 낀 채 아들의 단전 언저리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는 여느 아비가 자식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오랜 세월 참아온 조바심과 은밀한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이신은 열여덟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벌써 삼 년째 심법을 파고들었으나, 어느 문파의 무공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기운이 그의 몸속에서 이따금 요동친다는 것을, 오직 이무한만이 알고 있었다. 연무장 바닥에는 지난밤 내린 서리가 아직 채 녹지 않아 하얗게 서걱거렸고, 그 위로 두 부자의 숨결이 옅은 김이 되어 흩어졌다. "오늘도 안 되는 게냐." 이무한이 나지막이 물었으나 그 목소리에는 실망보다 조바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신은 대답 대신 다시 눈을 감고 단전으로 진기를 밀어 넣었는데, 이미 수백 번은 되풀이했을 그 동작이 오늘따라 유독 낯설게 느껴졌으니, 명치 아래에서 무언가 뜨겁게 부풀어 오르는 감각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고, 관자놀이의 핏줄이 툭 불거졌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무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세상에는 수백 갈래의 무력 계통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지존광계(至尊光系)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희귀 속성으로, 몸속의 진기를 순백의 빛으로 승화시켜 상대의 내력을 태워버리는 패도적인 성질을 지녔다고 전해졌다. 강호의 오랜 기록에도 지존광계를 각성한 자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으며, 그 희소성 때문에 각 세력이 눈에 불을 켜고 그런 인재를 찾아 헤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것은 축복이자 동시에 재앙의 씨앗이라, 강호의 옛 문헌들은 하나같이 지존광계를 얻은 자의 말로가 순탄치 않았음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었다. 이신의 손끝이 저릿해지는가 싶더니, 순간 그의 단전에서 눈부신 흰빛이 뿜어져 나와 연무장 전체를 물들였다. 번쩍! 빛무리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자 이무한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 빛 속에서 아들의 몸이 마치 새로 태어난 듯 낯설게 보이는 것이 그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연무장을 둘러싼 오래된 소나무들이 그 빛에 놀란 듯 잎사귀를 파르르 떨었고, 담장 위에 앉아 있던 까치 한 마리가 다급히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솟구쳤다. "아버님, 이게……." 이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하자, 이무한은 오랫동안 가슴에 눌러왔던 무언가가 마침내 터져 나온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아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손아귀의 힘이 얼마나 셌던지 이신은 잠시 통증을 느꼈으나, 아버지의 얼굴에 어린 기이한 표정 앞에서 감히 아프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지존광계다. 네가, 드디어……." 그의 목소리는 기쁨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 두려움의 정체를 이신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이무한의 눈빛 깊은 곳에는 기쁨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으나, 아들은 그저 자신의 몸속에서 처음으로 완성된 기운의 낯섦에 취해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하늘이 갑작스레 먹빛으로 물들며 까마귀 떼가 요란하게 울부짖고 흑암산 봉우리마다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기 시작했으니, 이무한의 낯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방금 전까지 아들을 향해 있던 기쁨의 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오래 묵은 전장의 노장이 위기를 직감했을 때 짓는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결계다." 그가 낮게 내뱉은 한마디에는 오랜 세월 쌓아온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세가의 담장 너머, 골짜기 입구 쪽에서 희뿌연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산 전체를 에워싸듯 퍼져 나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비쳐오는 빛깔이 예사롭지 않았다.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짐승처럼 골짜기의 굴곡을 따라 스멀스멀 기어올랐고, 그 끝자락이 닿는 곳마다 나뭇가지가 서리를 맞은 듯 하얗게 얼어붙었다. 이무한은 아들의 손목을 움켜쥔 채 연무장 밖으로 몸을 돌렸으나, 이미 세가의 정문 쪽에서 다급한 종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댕! 댕! 댕! 경계를 알리는 종소리가 흑암산 골짜기를 뒤흔드는 가운데, 정문 너머로 수십 개의 깃발이 바람을 타고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 그 깃발에는 낯설지 않은 문양, 정파를 표방하며 강호의 정의를 자처하는 성회(聖會)의 표식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세가의 무인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손에 쥔 채 정문으로 몰려드는 발소리가 마치 폭우처럼 골짜기를 뒤덮었으며, 그 소란 속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짧게 터져 나왔다가 이내 다른 소리에 묻혔다. 이신은 각성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정문을 향해 달려가야만 했다. 방금 전까지 몸속을 채웠던 눈부신 흰빛의 감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알 수 없는 불안이 서늘하게 차올랐다. 오늘, 그가 평생 잊지 못할 하루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