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속마음이 들리는 밤

5화

딸랑,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나고서야 나는 다시 그 오피스텔 안에 들어섰다. 며칠 전과 같은 자리, 같은 소파, 같은 냄새였다. 은은한 우드향 디퓨저와 갓 내린 커피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는데,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낯선 공간인데도 낯설지 않다는 게, 그게 더 이상했다.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가다가 나는 냉장고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자석으로 고정된 종이 여러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병원 진료 예약표였다. 한 장, 두 장, 세 장. 이름이 각각 달랐다. 서지아, 한소이, 이하은. 날짜도 병원도 제각각이었지만 그 세 장의 종이가 나란히 붙어 있는 모습이 왜인지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뭘 그렇게 봐." 서지아의 목소리에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서랍을 열어 뭔가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 서랍 안에는 통장 사본이 세 개, 각자의 이름이 적힌 파일에 나눠져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곁눈으로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뭔가를 훔쳐본 기분이 들어서 볼이 살짝 달아올랐다. 벽 쪽으로 눈을 옮기니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아마 대학생쯍 되어 보이는 세 사람이 어깨를 겯고 나란히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한소이는 지금보다 머리가 훨씬 길었고, 서지아는 안경을 썼고, 이하은은 그때도 지금과 똑같이 파란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는 방식이, 마치 오래된 가족사진처럼 자연스러웠다. 그제야 나는 이 관계의 크기를 실감했다. "우리, 벌써 4년째야." 한소이가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필터를 접어 드리퍼에 얹고, 갈아둔 원두를 천천히 부으며 무심하게 던진 말이었다. 그 손놀림이 너무 익숙해서, 마치 수백 번은 해봤을 동작처럼 매끄러웠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놓칠 뻔했다. "4년……이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4년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제대로 자리를 못 잡고 붕붕 떠다녔다. "셋이 같이 산 지는 2년째고. 그 전엔 각자 따로 지내면서도 계속 만났었어." 서지아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댄 채 다리를 꼬며 덧붙였다. 손톱을 만지던 그녀의 손끝이 아무렇지 않게 허공을 긁었다. 그 태연함이, 나에게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이게 단순히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세계, 오랜 시간 다져진 공동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서로의 생일을 챙기고, 아플 때 병원에 데려다주고, 돈을 나누어 쓰는 삶. 그건 내가 알던 연애라는 개념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무언가였다. 마치 뿌리가 세 갈래로 나뉘었지만 결국 같은 땅속에서 얽혀 있는 나무 같았다. "근데 왜……셋이서……" 말을 끝맺지 못하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몰랐다. "이상해?" 한소이가 커피를 따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나쁜 뜻은 없어 보였지만, 그 질문에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요, 그냥……궁금해서요. 셋이 다 같이 지내는 거." "셋이 다 같이 지내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서지아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 짧은 문장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소이 언니는……원래 혼자였어요?"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한소이의 손이 잠시 멈췄다. 드리퍼 위로 떨어지던 물줄기가 잠깐 흔들렸다. 커피포트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동안,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대답했다. "가족이 다 사고로 죽었어. 나만 살았고." 짧은 문장이었는데도 그 안에 담긴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져, 나는 숨을 삼켰다. 목이 메었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한소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컵에 커피를 따랐지만, 그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컵 손잡이를 쥐던 손가락이 잠깐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서 지아랑 하은이가 소중해." 그 말을 하는 한소이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나는 그 담담함 아래 깔린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홀로 버텨온 사람이 겨우 찾아낸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절박함 같은 것. 서지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소이의 등 뒤로 다가가더니, 아무 말 없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짓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무언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 시선을 내렸다. *** 그날 저녁, 나는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골목 어귀에서 휴대폰이 울렸을 때,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받을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낮고 화가 눌러 담긴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이하은이 너 어디로 데려갔다는 얘기 들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물을 새도 없이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그 여자들이랑 어울리지 마. 너 하나로도 이 집이 어떻게 됐는지 몰라서 그래?" "……아빠, 그게 무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안이 바싹 말라서 혀가 붙는 느낌이었다. "둘 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낳지도 않았어." 그 말이 귀에 박히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골목에 서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는데도 그걸 느낄 겨를이 없었다. "아빠……" 목소리가 갈라졌다. 대답 대신 뚝, 전화가 끊겼다. 신호음이 뚜뚜뚜 울리는 걸 나는 한참 동안 귀에 대고 있었다. 마치 그 소리가 멈추면 정말로 모든 게 끝나버릴 것 같아서. 전화가 끊긴 뒤에도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골목의 가로등이 깜빡이는 걸 멍하니 보다가, 나는 겨우 다리를 움직여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발걸음 하나 옮길 때마다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서 다시 재생됐다. 둘 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낳지도 않았어. 그 문장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서, 밥을 먹어도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 다음 날, 언니에게 그 얘기를 전했을 때 언니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피스텔 창가에 서서 커피잔을 든 채, 파란 눈이 창밖을 향한 채 잠시 멈췄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신경 쓰지 마."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말 속에 아버지에게 맞설 각오가 이미 서 있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마치 이런 순간을 이미 몇 번이고 상상해두었던 사람처럼, 언니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근데 아빠가……" "아빠가 뭐라고 하든, 우리 셋은 안 변해. 너도." 그 말이 위로가 되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그 말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새겼다. 우리 셋은 안 변해, 너도. 그 문장이 왜 이렇게 무겁게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한소이가 부엌에서 나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희 아버지, 어떤 사람이야." 질문이라기보다는 이미 답을 알고 던지는 말투였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고개를 숙였다. "무섭고……화나면 물건도 던지고, 그런 사람이에요." 말을 하면서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서지아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람일수록 겁이 많은 거야." 그 말이 위로였는지 경고였는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아버지의 분노가 이걸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자꾸만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창밖으로 지는 해가 방 안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는데, 그 색이 이상하게도 핏빛처럼 느껴져서 나는 저도 모르게 팔을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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