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서지아의 어깨 너머로, 보라색 머리를 짧게 친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는 156센티 정도로 나보다 훨씬 작았지만, 슬림하면서도 단단한 몸의 선이 그녀가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서른에 가까워 보이는 나이, 눈가에 자리한 옅은 주름마저 이상하게 다정해 보였다. 목소리의 결이 서지아와는 전혀 달랐다. 서지아의 것이 끈적하게 감겨오는 느낌이었다면, 이 여자의 목소리는 물처럼 담담하게 흘러 들어와 귓속에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소이야, 벌써 끼어들면 재미없잖아."
서지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물러섰다. 손끝이 목덜미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져 나가는 감각에,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목 뒤에 남은 서늘한 흔적이 아직도 생생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손으로 그 자리를 감쌌다.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는 내 입술을 보며 한소이라는 여자가 픽 웃었다.
"떨고 있잖아. 그런데도 도망은 안 갔네."
그 말이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도망갈 수 없어서 못 간 것뿐인데, 그녀는 마치 내가 대단한 결정을 내린 것처럼 말했다. 그녀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서지아의 손과는 다르게, 따뜻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는데, 그 촉감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마치 오래 일한 사람의 손 같았다. 무언가를 쥐고, 버티고, 다시 쥐어본 흔적이 손바닥 곳곳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앉아."
소파로 이끌려 앉는 동안 나는 온몸의 힘이 눈사람 녹듯 풀려버리는 걸 느꼈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서,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자마자 몸이 절로 푹 꺼졌다. 언니가 어느새 다가와 내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담요는 낡았지만 부드러웠고, 세제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 서지아는 부엌 쪽으로 걸어가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딸그락, 그릇 부딪는 소리, 이어 달그락거리며 컵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물 끓는 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채우는 동안, 나는 방금까지 있었던 일이 꿈이었나 싶을 만큼 낯설고도 아득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거실을 둘러볼 여유가 그제야 생겼다.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물건 하나하나가 정갈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낡은 소파, 색이 바랜 러그,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 두 개. 사람이 실제로 살고 있는 냄새가 나는 집이었다. 내가 알던 집들과는 어딘가 결이 달랐다.
"차 마셔. 몸 좀 데워야지."
서지아가 김이 오르는 잔을 내밀었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어딘가 서투르게 다정한 손짓이었다. 잔을 받아 든 손끝이 뜨거워서 나는 잠깐 숨을 들이켰다. 한소이는 내 옆에 앉아 담요 끝을 다시 여며주었고, 언니는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넷이 모여 앉은 거실에,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온기가 감돌았다.
"이거, 그냥 보리차야. 독 안 탔어."
서지아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한소이가 옆에서 낮게 웃었다.
"애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닌데. 얼굴이 너무 얼어 있어서."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팔목까지 퍼지는 게 느껴졌다. 목이 메어서 차를 삼키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억지로 한 모금을 넘겼다. 미지근한 물맛에 옅은 곡물 향이 섞여 있었다.
"서연아."
언니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그 부름 하나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언니가 저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 적이 있었나 싶어서, 나는 고개를 들어 언니를 바라봤다.
"이거, 받아."
언니가 목에서 낡은 목걸이를 풀어 내 손에 쥐여주었다. 금도금이 벗겨져 은빛이 드러난, 오래된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손바닥 위에 놓인 목걸이의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했다. 체온이 남아 있는 듯 미미하게 따뜻했다.
"엄마가 나 어릴 때 준 거야. 이제부터는……우리가 네 가족이야."
그 말이 가슴 한가운데를 훅 파고들었다. 콧잔등이 시큰거렸고, 눈앞이 뜨겁게 흐려졌다. 나는 목걸이를 손안에 꼭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구멍이 좁아져서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한소이가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고, 서지아는 아무 말 없이 내 무릎에 손을 얹었다. 그 손길들이 하나같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처음이 아닌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울지 마.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서지아가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그 속에 숨은 다른 감정을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
그날 밤, 나는 다시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어둠과 정적이 나를 맞이했다. 신발을 벗는 손끝이 떨렸다. 조명을 켜지 않은 채로 방까지 걸어가, 텅 빈 방에 홀로 누워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펜던트의 표면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차갑다가 이내 온기를 되찾았다.
어릴 적 엄마가 "동생은 더 안 낳을 거야"라고 딱 잘라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옆얼굴, 무심한 눈빛, 그리고 그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아버지의 모습까지도. 그리고 아버지가 나를 볼 때마다 짓던 그 서운한 표정도. 마치 내가 원했던 결과물이 아니라는 듯한, 미묘하게 실망한 얼굴이었다. 부모님에게 나는 늘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흔적이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자리, 아무리 애써도 메워지지 않는 빈틈.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낯선 손길이었는데도 무섭지가 않았고, 처음 보는 온기였는데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손길들이 사라질까 봐, 이 짧은 하루가 그저 꿈처럼 흩어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목걸이를 가슴 위에 올려두고, 나는 천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눈이 점점 익숙해지자 방 안의 낡은 벽지 무늬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늬를 따라가듯 시선을 옮기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오늘 있었던 일들이 계속 되풀이됐다. 서지아의 손끝이 목덜미를 스치던 감각, 한소이의 굳은살 박인 따뜻한 손, 언니가 목걸이를 건네며 짓던 표정.
그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나는 잠들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어둠 속에서 액정 불빛이 방 안을 창백하게 밝혔다. 발신자를 확인한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