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속마음이 들리는 밤

3화

언니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걷는 동안, 나는 계속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펫이 깔린 복도는 소리를 삼키는 재질이라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고, 그 고요함이 오히려 심장 뛰는 소리를 더 크게 들리게 만들었다. 언니의 걸음은 익숙한 듯 빠르고 가벼웠지만 나는 한 걸음 뗄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괜찮을까. 문 앞에 서서 언니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끝을 바라보는데, 손등에 옅게 남은 흉터 같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생긴 건지 물어본 적도 없었다. 언니에 대해 내가 아는 건 늘 이렇게 파편적이었다. 삐빅, 도어락이 풀리는 전자음이 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향이 훅 끼쳐왔다. 언니에게서 나던 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짙고, 조금 더 위험한 냄새였다. 마치 겨울바람이 향수병 안에 갇혀 있다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처럼, 시리면서도 무거운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실 조명은 낮게 깔려 있었고,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여자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금발을 어깨 아래로 늘어뜨린, 178센티는 되어 보이는 장신의 여자였다. 눈매가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나른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 하나에 벽까지 뒷걸음질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자의 몸은 소파에 늘어져 있는데도 어딘가 팽팽했다. 사자가 초원에 배를 깔고 누워 있어도 언제든 튀어오를 수 있는 것처럼, 그 나른함 안에는 감춰지지 않는 긴장이 있었다. 손톱은 짙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손가락 하나가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왔어?" 여자, 서지아가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걸음마다 나보다 훨씬 큰 키가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가까워졌고, 나는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을 뻐끔거렸다. 향이 점점 짙어지면서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동생이구나. 근데……" 서지아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 미소는 웃음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새로 들어온 사냥감의 무게를 가늠하는 눈빛으로. "머릿속으로 남 생각 훔쳐 듣는 거, 그거 재밌어? 아까부터 계속 우리 생각 엿듣고 있었잖아. 그치?" 그 말에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굴로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훔쳐 듣는 거. 그 말이 아침의 자책과 겹쳐지며 명치 아래를 날카롭게 찔렀다. 아침에 언니한테 그 말을 들었을 때도 이랬는데, 지금 처음 보는 사람 입에서 똑같은 말이 나오니 손끝부터 저려오는 기분이었다. 늘 그랬듯 도망치고 싶었다. 발이 저절로 뒤로 빠지려는데, 그 순간 처음으로 다른 목소리가 내 안에서 튀어나왔다. 아니, 오늘은 도망 안 가.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나왔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발바닥에 뿌리가 박힌 것처럼, 뒤로 물러서는 대신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오히려 서지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나조차도 놀랄 만큼 낯선 행동이었다.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였지만, 발은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서지아의 눈빛이 순간 흥미롭다는 듯 좁아졌다. "어어, 이거 봐라." 서지아가 낮게 웃으며 손을 들어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손끝이 차가웠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길고 마디가 굵어서, 내 턱을 감싸는데도 손 전체가 남는 느낌이었다. 눈을 마주친 순간, 고등학교 시절 그 선배의 눈빛이 겹쳐 보였다. 얘 좀 이상한 애 아니야. 복도 끝, 아이들 몇 명이 모여서 나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리던 그날의 공기가 훅 끼쳐오는 것 같았다. 그때도 나는 이렇게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못 했었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뭐 해. 눈 감아." 서지아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늘어졌다. 명령이라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결과를 통보하는 말투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지만, 발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입술이 맞닿았다. 부드럽지 않았다. 처음부터 힘이 실려 있었고, 서지아의 손이 내 뒷목을 붙잡아 고정시키는 동안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향이 코와 입 사이로 밀려들어와 머릿속을 온통 하얗게 지워버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얘 좀 이상한 애 아니야. 왜 자꾸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맞추는 것처럼 말하지. 그 목소리가, 몇 년이나 지난 그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 다시 귓가에서 재생되었고, 나는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눈앞이 흐려지고,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날 교실 뒷문에서 도망치던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발밑이 꺼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죽을 것 같아.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내 안에서 부딕치고 있었다. 두 감정이 팽팽하게 맞서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채, 나는 그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서지아의 손이 내 뒷목에서 등 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 손길 하나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언니는 어디 있지. 그 생각이 스치는데도, 정작 언니를 찾는 눈길조차 돌릴 수 없었다. "……잠깐." 겨우 그 한마디를 뱉어낸 순간, 서지아의 손이 멈췄다. 나는 눈을 뜨고 서지아를 바라보았다. 신뢰와 공포가 동시에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에게 몸을 맡겨도 되는 걸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는 걸까. 가까이서 본 서지아의 눈은 갈색이 아니라 옅은 회색빛이 도는 눈동자였다. 그 안에 내 얼굴이 조그맣게 비쳐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아서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서지아의 눈빛이 순간 더 짙어졌다. "잠깐이라니."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바로 닿을 듯 가깝게 울렸다. "이제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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