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혼돈을 품은 후계자

2화

다음 날 아침, 나는 저택 서재로 불려갔다. 시녀 하나가 문 앞까지 안내하고는 목례만 하고 물러났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게 뻔히 보였다. 저택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들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한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은근히 얕보면서. 서재 문은 무거웠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손끝이 시릴 만큼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밀고 들어서자 낡은 가죽 표지 책들이 빽빽이 꽂힌 책장이 사방을 둘렀고, 햇빛은 커튼 틈으로 겨우 한 줄 들어와 있었다. 아버지가 미리 와 있었다. 창가에 서서 밖을 보다가, 내가 들어서자 몸을 돌렸다. 표정은 여느 때처럼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낌새가 있었다. 오래 사람을 상대해본 눈이면 알 수 있는 종류의 긴장이었다. "앉아라." 나는 앉았다. 의자는 딱딱했고, 등받이가 유난히 높았다. 마치 이 자리에 앉는 사람은 편해질 자격이 없다는 듯이. 그가 서류 하나를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낡은 종이에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인장 모양이 눈에 익었다. 저택 곳곳에 새겨진 가문 문양과 같았다. "영체 각성 의식 신청서다." 아버지가 말했다. "올해 안에 다시 도전해야 한다." 다시, 라는 말에 걸렸다. 나는 종이를 내려다보며 이현성의 기억을 더듬었다. 몇 년 전, 이현성이 아직 이 몸으로 온전히 살아가던 시절, 첫 번째 각성 시도에서 실패했었다.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발현되지 않은 채 끝났다. 결과지는 백지였다. 등급도, 속성도,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채로. 그 후로 저택 안에서 이현성을 부르는 별칭이 하나 생겼다. 영체 각성 실패자. 부르기 쉬운 이름이었다. 짧고, 정확하고, 잔인했다. "실패자라는 소리,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느냐." "복도에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현성의 기억 속에 이미 그 말이 박혀 있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감각까지 통째로 들어와 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도망치듯 걸었던 순간. 남의 기억인데도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 서류를 손끝으로 두어 번 두드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또 실패하면, 후계자 지명은 취소된다. 가신 회의에서 이미 그렇게 결정했다." 담담하게 나온 말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나는 서재의 책장을 잠깐 쳐다보았다. 낡은 책들 사이에 가문의 역대 계승자들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있었다. 그중 어디에도 실패자라는 이름은 없었다. 다들 성공한 자들만 저 자리에 남는 모양이었다. 이현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곧 이 가문의 이름을 짊어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사라지면, 유민호와 장서혁을 찾아가 복수할 자격조차 사라질 수 있었다. 힘 없는 자에게는 복수할 권리도 없다. 그 정도는 특종병 시절에 이미 배웠다. 힘 없이 정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어떻게 짓밟혔는지, 나는 취재 수첩에 몇 번이나 받아 적은 적이 있었다. "하겠습니다." 나는 서류를 끌어당겨 손끝으로 짚었다. "의식에 나가겠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위험을 아느냐?" "압니다." 영체 각성 의식은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었다. 몸속에 잠재된 영체, 이 세계 사람들이 타고나는 힘의 그릇을 강제로 자극해 그 성질과 등급을 드러내는 절차였다. 실패하면 등급 없음으로 낙인찍히고, 심한 경우 몸의 균형이 깨져 회복 불가능한 후유증을 남기기도 했다. 팔다리가 뒤틀리거나, 정신이 흐려지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은 사례도 있었다고 했다. 이현성은 이미 한 번 실패했다. 두 번째 실패는 곧 완전한 실격을 의미했다. "영체 각성 실패자가 다시 도전한다는 게 알려지면, 가문 안에서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낮게 말했다. "소문이 이미 돌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겠다는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으로 뚫고 나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낙인을 피해 도망치면, 남는 건 껍데기뿐인 이름이었다. 그 이름으로는 아무도 지킬 수 없고, 아무도 갚아줄 수 없다. 아버지는 서류 위에 도장을 하나 더 찍었다. 쿵, 하는 짧은 소리가 서재 안에 퍽 하고 퍼졌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의식 날짜는 보름 뒤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때까지 몸을 만들어라. 도장까지 찍혔으니 이제 물러설 곳도 없다." "알겠습니다." 서재를 나서는데 복도에서 가신 두 명이 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추는 걸 들었다. "저 몸으로 또 도전한다는군." "이번에도 헛수고겠지. 저번에도 은빛 제단 앞에서 손만 얹고 아무 반응도 없었잖나." "이번엔 아예 웃음거리가 되겠어. 그 소문이 벌써 가신 회의까지 돌았다는데." 나는 그들을 지나치며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짧게 되뇌었다. 두고 봐라. 말은 쉽게 뱉었지만, 사실 나조차도 확신이 없었다. 이현성의 기억 속엔 첫 번째 실패의 흔적만 있었고, 내 안에서 이따금 울리는 이 진동이 그 은빛 제단 앞에서 정말로 뭔가를 보여줄지는 나도 몰랐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방으로 돌아온 뒤, 나는 이현성의 기억 속에서 첫 번째 각성 시도의 장면을 더 자세히 끌어냈다. 넓은 홀, 원형으로 늘어선 가신들, 중앙에 놓인 은빛 제단. 제단 표면에는 가문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 위로 옅은 빛이 항상 감돌았다고 했다. 어린 이현성이 그 위에 손을 얹었을 때, 빛은 잠깐 흔들리는 듯하다가 그대로 잦아들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적, 그리고 실망한 시선들. 몇몇은 낮게 한숨을 쉬었고, 몇몇은 눈을 피했다. 그 순간의 공기가 이현성의 기억 속에 통째로 얼어붙어 있었다. 어린 이현성은 그 뒤로 오랫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밥도 거르고, 사람도 만나지 않고, 그저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기억을 되짚는 내내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남의 상처인데, 자꾸 내 것처럼 느껴졌다. 몸을 물려받았다는 게 이런 식으로도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이현성이 아니었다. 몸은 같아도, 그 안에 든 것은 달랐다. 가슴 한가운데가 다시 미약하게 울렸다. 이번에는 진동이 규칙적이었다. 마치 무언가가 리듬을 맞춰가는 것처럼. 심장 박동과는 다른, 더 낮고 더 느린 진동이었다. 나는 옷깃을 풀고 가슴에 손을 대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다만 그 아래 아주 작은 것이, 분명히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뭐가 있는 건 확실한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문제는 그게 뭔지 모른다는 거지." 만약 이게 정말로 영체라면, 왜 첫 번째 시도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을까. 만약 영체가 아니라면, 이건 대체 뭘까. 특종병으로 살면서도 이렇게 답 없는 취재는 해본 적이 없었다. 취재원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창밖에서 소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도련님! 식사하세요!" 늘 밝은 목소리였다. 저택 안에서 유일하게 눈치를 안 보고 나를 대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옷깃을 다시 여미고 방문을 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 안쪽에서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함께 흔들렸다. 식당에 들어서자 이미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국그릇에서 김이 올라오고, 반찬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평범한 저녁 풍경이었다. 조금 전까지 가문 존폐를 걸고 도장을 찍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정갈한 식사였다. 식당에서 아버지는 다시 나를 지켜보았다. 표면적으로는 격려의 눈빛이었지만, 그 아래 어딘가 불안이 섞여 있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도전을 허락했지만, 그도 확신은 없어 보였다. 숟가락을 드는 손이 평소보다 느렸다. 소연이 국그릇을 내 앞에 놓으며 작게 물었다. "도련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어디 불편하세요?" "괜찮아." 나는 짧게 답했다. 가슴 안쪽의 진동을 말할 수는 없었다. 말해봐야 걱정만 늘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고 누웠다. 창밖에서 바람이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덜컹. 덜컹. 잠들기 직전, 가슴 안쪽의 진동이 갑자기 뚜렷해졌다. 무겁고 낮은 울림이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되었다. 마치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안쪽에서.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목소리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또렷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파편 같은 울림이었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그건 내 안에서 난 것이었다. 뭔가가, 안에서, 눈을 뜨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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