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둘 다라니.
혈문호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인 건지, 나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둘 다 죽이겠다는 뜻인가.
아니, 설마가 아니라 진짜 그런 뜻인 것 같아서 더 무서웠다.
어쨌든 상황은 최악이었다.
최악보다 한 단계 더 안 좋은 뭔가가 있다면 딱 지금이었다.
임지훈의 몸에서 뭔가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화신경(火神境).
영동경보다 한 단계 위, 완전히 다른 세계의 강자.
무협지에서 흔히 하는 표현으로 치면 '경지가 다르다'는 거였다.
게임으로 치면 나는 이제 막 튜토리얼 끝낸 렙1이고, 저건 서버 최초 만렙 랭커였다.
아니 만렙이라는 표현도 부족했다.
저건 서버 관리자 계정이었다.
나는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그 순간 직감으로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욥기 41:24, 그 마음이 돌 같이 단단하니 그것은 맷돌 아랫짝같이 단단하도다]
지금 임지훈 눈에 든 게 딱 저 맷돌 같은 단단함이었다.
슬픔과 분노로 굳어진 눈.
저 눈은 협상이 안 되는 눈이었다.
동네 편의점 알바생한테 삼각김밥 유통기한 지났다고 항의하는 손님 눈도 아니고,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분노였다.
혈문호가 먼저 임지훈을 향해 몸을 날렸다.
거대한 앞발이 허공을 갈랐다.
임지훈이 검을 휘두르며 맞섰다.
부상이 있는지 동작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래도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쩌엉!
검과 앞발이 부딪치는 소리가 야산 전체에 울렸다.
근처 나무 몇 그루가 그 여파만으로 흔들렸다.
새들이 놀라서 우르르 날아올랐다.
혈문호가 뒤로 밀려났다.
발톱으로 땅을 파고들어 겨우 균형을 잡는 모습이 보였다.
임지훈이 부상 상태임에도 저 정도 위력을 낸다는 건, 정상 상태라면 얼마나 더 강할지 상상도 안 됐다.
지금 저 사람 컨디션 100%였으면 나는 진작에 먼지가 되어 있었을 거다.
나는 그 틈을 타 뒤로 슬쩍 물러났다.
발끝으로 조용히, 최대한 존재감을 지우면서.
지금 여기서 얼쩡거리다간 둘 다 나를 노릴 판이었다.
게다가 두 강자 사이에 낀 조연은 대부분 첫 번째로 죽는 게 이 바닥의 국룰이었다.
하지만 임지훈이 그 틈을 놔주지 않았다.
"어딜 도망가."
그가 손을 휘저었고, 붉은 기운이 화살처럼 나를 향해 날아왔다.
촤아아악!
나는 몸을 던져 옆으로 굴렀다.
땅에 등이 부딪히면서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지만, 지금 숨 막힌다고 멈춰 있으면 진짜 숨이 끊어질 판이었다.
기운이 등 뒤 바위를 그대로 부숴버렸다.
쾅!
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등에 몇 개가 박혔다.
따가운 정도가 아니라 뭔가 뜨거운 느낌이었다.
마치 누가 등에 삼겹살을 굽고 있는데 불판이 아니라 내 살갗이 불판인 느낌이었다.
농담이 나올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런 순간에도 농담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나는 진짜 어지간히 정신이 나간 게 맞았다.
[시편 55:6, 내가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라]
비둘기 날개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도망칠 다리는 있었다.
문제는 도망칠 데가 없다는 것.
야산 한복판에서 화신경급 강자한테 쫓기는데 어디로 도망을 가나.
설령 도망친다 해도 저 붉은 기운이 뒤통수를 그냥 뚫어버릴 게 뻔했다.
혈문호가 다시 임지훈을 향해 달려들었고, 임지훈은 검으로 정면 승부를 걸었다.
쿠구궁,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둘의 싸움이 격화되는 사이, 나는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도망치면 등을 보이는 순간 저 붉은 기운에 맞을 거다.
그렇다고 싸움에 끼어들면 둘 중 하나에게 죽는다.
가만히 있어도 죽고, 움직여도 죽고.
이건 무슨 삼거리도 아니고 죽음으로 가는 사거리였다.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택지가 아예 없었다.
그때 청구슬이 다시 뜨거워졌다.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마치 뜨거운 국물 든 배달 용기를 맨손으로 받은 느낌이었다.
[조화신공 - 위협 감지, 정화 가속]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몸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반응 속도가 또 한 단계 올라간 느낌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갑자기 버프가 걸린 셈인데, 정작 나는 이 버프가 언제 끝나는지 지속시간도 모르는 상태였다.
임지훈이 혈문호의 목을 검으로 크게 그었다.
촤악!
혈문호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목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동생을 죽인 상대에게 복수는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그걸로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저건 승리의 얼굴이 아니었다.
혈문호가 결국 몸을 돌려 도망쳤다.
야산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모습이 어이없게도 좀 짠했다.
방금까지 사람 잡아먹으려던 놈인데도.
남은 건 임지훈과 나뿐이었다.
야산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새 소리도, 바람 소리도 없었다.
있는 건 임지훈의 숨소리와 내 심장 뛰는 소리뿐이었다.
그가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 걸음걸이가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더 소름이 끼쳤다.
"넌 뭐냐."
그가 물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졌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화가 나서 소리치는 사람보다, 화를 억누르면서 조용히 묻는 사람이 훨씬 무섭다는 걸 나는 이 순간 뼈저리게 배웠다.
"범인입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거짓말이 통할 상황이 아니었다.
어설픈 변명은 오히려 죽음을 앞당길 뿐이었다.
"범인이 혈문호 앞발을 맞고도 갈비뼈만 나가고 살아있어?"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표정이었다.
당연히 이상하지, 나도 내가 왜 살아있는지 정확히 모르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운으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지."
그가 검을 다시 들었다.
검날에 묻은 피가 흘러 손목까지 적셨다.
"도현이가 죽은 건 네놈 때문이다."
"제가 밀친 건 구하려던 거였습니다."
"결과는 죽음이야."
논리적으로 반박할 게 없었다.
결과만 보면 정확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뒤엔 도현을 죽인 게 나였는지, 아니면 혈문호였는지 하는 인과가 완전히 왜곡되어 있었다.
이건 마치 임대차 계약 분쟁에서 세입자가 집주인 배관 터진 걸 신고했는데, 물이 넘쳤다는 결과만 보고 세입자를 탓하는 격이었다.
아니, 이 비유가 지금 무슨 도움이 되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머릿속이 이렇게라도 굴러가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임지훈이 검을 들고 다가왔다.
부상당한 몸이지만, 그래도 화신경.
영동경 중기인 나와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전도서 7:17, 지나치게 악하지도 말라 어찌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지금 이 상황에서 저 구절이 나한테 하는 말이라면, 나는 딱히 지나치게 악한 적도 없는데 기한 전에 죽을 판이었다.
성경도 참, 이럴 때는 좀 더 구체적으로 조언을 해주지.
'검을 피하는 방법 3가지' 같은 챕터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살고 싶으면 여기서 무릎 꿇고 빌어라."
임지훈이 말했다.
목소리에 자비 따위는 없었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무릎을 꿇는다고 저 사람이 나를 살려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도현의 죽음에 대한 화풀이로 이대로 끝낼 확률이 훨씬 높아 보였다.
분노한 사람한테 무릎 꿇는 건 협상이 아니라 그냥 처형을 편하게 해주는 행위였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손바닥 안에서 청구슬이 다시 강하게 진동했다.
뭔가 임계점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마치 배터리 충전 99%에서 100% 넘어가는 그 찰나의 감각이었다.
"싫습니다."
내 대답에 임지훈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이었다.
"제가 왜 빌어야 합니까.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말을 뱉고 나서도 내가 이 말을 진짜로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화신경급 강자 앞에서 이런 대답을 하는 게 정상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이 순간만큼은 무릎 꿇는 것보다 이게 더 맞는 선택 같았다.
그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다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주변 공기가 확 뜨거워졌다.
마치 여름날 에어컨 없는 방에 문을 딱 닫아버린 느낌이었다.
"그럼 여기서 죽어라."
검이 나를 향해 떨어졌다.
나는 몸을 던졌지만, 이번엔 아까와는 위력이 달랐다.
검이 스치기만 했는데도 옆구리가 완전히 갈라졌다.
뜨거운 피가 옷을 적셨다.
숨이 턱 막혔다.
아프다는 감각도 정확히 오지 않았다.
그냥 뭔가 몸의 절반이 사라진 것 같은 이상한 공허함이 먼저 왔다.
이대로면 진짜 죽는다.
드라마에서처럼 죽기 직전에 인생 파노라마가 스쳐 지나가지도 않았다.
그냥 아, 여기서 끝인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청구슬이 이번엔 뭔가 다른 신호를 보냈다.
뜨겁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마치 몸 안에서 태양이 뜨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손바닥에서 시작된 열기가 팔을 타고 어깨, 가슴까지 번져나갔다.
[조화신공 - 봉인 해제 임박]
뭐가 해제된다는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게 내 유일한 살 길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임지훈의 검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이번엔 확실히 끝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