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폐허를 지나고 나서도 우리는 한참을 더 걸었다.
발밑의 흙이 조금씩 딱딱해졌다. 풀뿌리가 드문드문해지고, 대신 검은 돌들이 지면을 채웠다. 산맥의 경사가 점점 가팔라졌다.
서문강의 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그의 등을 보며 걸었다. 넓은 어깨, 곧게 뻗은 허리. 그 자세만으로도 그가 걸어온 세월이 짐작되었다. 인간계에서 나도 그런 걸음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는 그 걸음조차 서투르게 느껴졌다.
나는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칠겁천뢰를 통과한 직후라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폐 깊은 곳에서 통증이 울렸다. 다리 근육이 뻣뻣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의 통증으로 걸음을 늦추면, 이 세계에서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다.
"저 산이 보이는가."
서문강이 앞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구름 속에 묻힌 산봉우리가 보였다. 다른 산들보다 유독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산 자체가 빛을 삼키는 것처럼.
"접인산이다."
"접인산?"
"비상자들이 최초로 도착하는 곳이 이 근처인데, 그 중심에 있는 산이다. 접인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 그렇게 불린다. 인족에게는 금지구역이나 마찬가지로 신성한 곳이다."
나는 그 산을 바라보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했다.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인간계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냉기였다. 몸을 얼리는 냉기가 아니라, 정신을 짓누르는 냉기였다.
"이 냉기가, 접인의 기운이오?"
"그렇다."
서문강이 짧게 대답했다.
"모든 비상자는 저 산의 기운을 통과해서 이 세계에 발을 들인다. 너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가."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칠겁천뢰의 문을 지나던 순간, 온몸을 휘감았던 서늘한 감각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산을 보며 비로소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저곳을 지키는 것도 성전의 임무 중 하나다."
서문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최근 그곳 주변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이상한 기운?"
서문강이 잠시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접인산 쪽으로 고정되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산 쪽에서 불어왔다. 그 바람에는 냄새가 있었다. 쇠 냄새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짙고, 더 불쾌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삼두 마조."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세 개의 머리를 가진 마조다. 마신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흉포한 존재 중 하나지."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이름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이라는 말은, 인간계의 신화에서도 종종 등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이야기 속의 존재였다. 이곳에서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재하는 위협이었다.
"그것이 접인산을 노린다는 뜻이오?"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정찰조가 최근 몇 차례 접인산 근처에서 마기(魔氣)의 흔적을 발견했다."
서문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흔적이라 함은."
"발자국, 잘려나간 나무, 죽은 짐승들. 목이 뜯긴 채로 발견되었다. 세 개의 이빨 자국이 동시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입을 다물었다.
세 개의 이빨 자국. 그 말 하나로 그 짐승의 크기와 흉포함이 짐작되었다.
"접인산이 뚫리면, 새로운 비상자들이 도착하는 통로 자체가 위험해진다. 인족의 미래 자체가 끊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비상의 문을 지나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문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처음 들었다.
"그럼 앞으로 이곳으로 넘어올 자들은."
"그들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서문강의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음 속에 담긴 무게가 느껴졌다.
"삼두 마조는 얼마나 강하오?"
"현경상계 다섯 명이 함께 나서야 겨우 상대할 수 있는 존재다."
서문강이 짧게 답했다.
"현경상계."
나는 그 말을 되뇌었다.
"당신이 그 경지에 있다고 했소."
"그렇다."
"그런데 다섯 명이 함께 나서야 한다니."
서문강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이곳의 강함은 인간계의 상상을 벗어난다. 이제 조금은 감이 잡히는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인간계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존재들이 이 세계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인간계에서 나름의 위명을 얻은 몸이었다. 수백 번의 생사를 오갔고, 그 끝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곳의 척도로는,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생에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만이 죽음을 불렀고, 죽음이 다시 새로운 시작을 불렀다. 이번에는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부정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아버린 뒤였다.
"두려운가."
서문강이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두려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나를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두렵소."
나는 솔직히 답했다.
"그러나 물러날 생각은 없소."
서문강이 나를 바라보았다.
오래.
그의 눈빛에는 평가의 색이 담겨 있었다. 시험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기억해 두겠다."
"기억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오."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그 말을 다시 꺼내겠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으나, 서문강은 이미 몸을 돌린 뒤였다.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접인산을 지나쳐 가는 길목에서,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산 위로 검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구름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데도 그 자리에 고정된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 구름 자체가 무언가를 지키고 있거나, 혹은 무언가를 가두고 있는 것처럼.
인간계에서는 하늘의 구름을 보며 날씨를 짐작했다. 이곳에서는 그 구름 속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전생에서는 자연의 변화를 단순한 조짐으로 여겼다. 이번에는 그 조짐 하나하나가 생사를 가르는 단서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저 구름은 항상 저런 모양이오?"
내가 물었다.
"아니다."
서문강이 짧게 답했다.
"평소에는 옅고 얇았다. 지금처럼 짙게 깔린 것은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다."
"최근이라면, 삼두 마조가 나타난 시기와 겹치는 것이오?"
서문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성전까지는 얼마나 남았소."
"반나절 정도."
서문강이 걸음의 속도를 조금 높였다.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최근 밤에는 이 길에 마족의 척후병이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었다."
"척후병이라 함은, 삼두 마조의 수하를 뜻하는 것이오?"
"마신계의 하급 마인들이다. 삼두 마조와 직접적인 관계는 알 수 없으나, 그 시기에 함께 활동이 늘었다는 것은 우연이라 보기 힘들다."
나는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손끝에서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인간계에서 수백 번의 생사를 오가며 익힌 이 감각만큼은, 이곳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칠겁천뢰를 넘고, 다른 세계에 떨어지고, 인간계에서는 상상조차 못 한 존재들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검을 쥐는 이 손의 감각만은, 세계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나는 접인산을 향해 다시 한번 시선을 던졌다.
산은 여전히 검은 구름에 덮여 있었다. 그 아래로 산의 능선이 검게 뻗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상 같았다.
검은 구름 속에서, 아주 잠깐, 무언가 붉은 빛이 번뜩였던 것 같았다.
눈을 의심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를 다시 응시했다. 붉은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구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낮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착각이었을까.
그러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간 그 서늘한 감각은, 착각이라 여기기에는 너무나 선명했다.
서문강도 그것을 본 듯, 걸음을 멈추고 그 방향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의 담담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팽팽한 긴장이 들어섰다.
"저것은."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검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바람이 멈췄다.
산 쪽에서 불어오던 냉기가 한순간 더 짙어졌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그 냉기가 폐 속까지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서문강의 시선은 여전히 접인산 정상 부근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검으로 향했다.
나는 그 손의 움직임을 보았다.
현경상계에 이른 자의 손이, 지금 이 순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