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밤이 깊었다.
도원의 집 등불이 꺼진 지 오래였다. 마을 전체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파도 소리만이 멀리서 낮게 울려왔다. 밀려왔다가, 밀려가고, 다시 밀려왔다.
풀벌레 울음이 낮게 깔렸다. 여름밤 특유의 습기가 마당 흙바닥에서 올라왔다. 소금기 섞인 바람이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익숙한 냄새였다. 바다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매일 밤 스며드는 그 냄새.
그런데 그 익숙함 사이로, 낯선 소리가 끼어들었다.
창문 밖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자갈을 밟는 발소리였다. 조심스러웠다. 누군가 걸음을 죽이고 있었다.
도원은 잠에서 깼다. 완전히 깬 것은 아니었다. 몸의 반은 여전히 잠 속에 있었고, 나머지 반만 깨어 소리를 좇았다. 발소리는 멈추지 않고 마당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문틈으로 그림자가 보였다. 크지 않은 체구였다. 등불이 없어도, 그 실루엣만으로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도원아."
낮은 목소리였다. 누였다.
도원은 몸을 일으켰다. 잠결에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손끝에 문고리의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여름밤인데도 그 쇠붙이는 이상하게 서늘했다.
문을 열었다.
누는 여전히 옷자락에 흐릿한 얼룩이 남아 있었다.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무언가였다. 도원은 그 얼룩을 몇 번이나 보았는지 셀 수 없었다. 처음엔 흙탕물인가 생각했다. 나중엔 알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씻는다고 지워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누의 얼굴은 달빛 아래에서 유독 그늘져 보였다. 눈 밑이 거뭇했다. 며칠은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 시간에 왜요."
도원의 목소리는 잠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경계심은 남아 있었다.
"잠깐, 얘기하고 싶어서."
누는 대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시선의 방향이 마당 한켠, 나무 밑을 향했다. 마치 그곳이 정해진 자리인 것처럼, 누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도원도 그 옆에 앉았다. 나무 밑동은 축축했다. 낮 동안 내린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엉덩이에 닿는 습기가 잠을 조금 더 깨웠다.
한동안 누는 말이 없었다. 밤벌레 소리만 낮게 울렸다. 귀뚤귀뚤. 그 소리는 규칙적이었고, 그 규칙적임이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도원은 옆에 앉은 남자의 손을 흘깃 보았다. 손등에 마른 상처가 여러 개 나 있었다. 그물을 손질하다 생긴 상처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손이 지금은 무릎 위에서 가만히 떨리고 있었다.
"도원아, 넌 요아가 왜 선택됐는지 아느냐."
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신의 뜻이라고, 촌장님이 그러셨어요."
누는 짧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어떤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웃음소리라기보다는, 웃음의 형태를 흉내 낸 숨소리에 가까웠다.
"신의 뜻. 그래, 다들 그렇게 말한다."
"아저씨는 아니에요?"
누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하나가 유독 밝게 떠 있었다. 다른 별들보다 크지도, 색이 다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유독 그 별에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도원도 따라 그 별을 보았다. 왜 저 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누의 눈이 그곳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기에, 도원의 눈도 자연스레 그리로 끌려갔다.
"내가 정했다."
도원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벌레 울음이 갑자기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듯했다.
"뭐라고요?"
"내가, 요아를 제물로 정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도원은 그 말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들이 조합되어 만들어내는 의미는, 머릿속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마치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물처럼.
"왜요? 왜 아저씨가 정해요?"
"신제 의식에는, 매번 아홉 명 중 하나를 미리 골라두는 이가 있다. 그해에는 내가 그 역할이었다."
"그런 역할이... 있었어요? 그런 건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까.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은, 맡았다는 사실조차 함구해야 한다. 그것이 규칙이었다."
도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규칙이라는 말이 자꾸 걸렸다. 이 섬에는 왜 이렇게 많은 규칙이 있는 걸까. 그리고 그 규칙들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그런데 왜 요아를... 왜 자기 딸을..."
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달빛이 그 얼굴 위로 떨어졌지만, 그림자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다른 아이를 고르면, 그 부모가 나를 원망하겠지. 원망은 미움이 되고, 미움은 섬을 갈라놓는다. 그래서... 내 딸로 정했다."
도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화를 내야 하는지, 위로를 해야 하는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섬은 좁다. 사람도 적다. 원망이 하나 생기면, 그것이 대대로 이어진다. 그러니 내가 지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정당화가 돼요?"
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처음으로 그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그 균열은 아주 짧았다. 그러나 도원은 분명히 보았다. 단단하게 다져놓았던 무언가가, 그 한마디에 갈라지는 순간을.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해요? 마치, 그게 옳은 것처럼."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 없으니까."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어떤 긴 설명보다 컸다. 도원은 그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다. 마치 누가 지고 있던 짐의 일부가, 이 순간 자신의 어깨 위로도 옮겨 온 것 같았다.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도원은 무릎을 감싸 안았다. 밤공기가 차가워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는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도원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낮에 요아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손이었다. 손바닥 한가운데, 그때의 미열이 아직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요아는, 여전히 있어요."
누의 눈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순간적이었지만, 강렬했다. 마치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문이 갑자기 삐걱 열리는 소리를 낸 것 같았다.
"뭐라고 했느냐."
"제 안에요. 목소리로 들려요. 별로 보여요."
"별로... 보인다고?"
"네. 낮에, 갑자기요. 손이 뜨거워지면서, 별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렸어요."
누는 오랫동안 도원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놀람, 의심,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어떤 간절함. 도원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러나 도원은 알았다. 누가 울고 있다는 것을. 어깨의 떨림이 점점 커졌다가, 다시 작아졌다가, 또 커졌다. 마치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파도처럼.
도원은 손을 뻗을까 말까 고민했다. 결국 뻗지 못했다. 이 남자의 슬픔에, 자신이 함부로 손을 댈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풀벌레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채워주고 있었다.
한참 뒤, 누가 손을 내렸다. 눈가가 붉었다. 눈물 자국이 달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났다.
"도원아, 그 애 목소리를 들었다면..."
말을 멈추고 그는 하늘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까 그 밝은 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제발, 살려줄 수 있겠느냐."
도원은 그 말에 놀랐다. 방금까지의 죄책감과 정당화가 뒤섞인 남자가, 지금은 오직 아버지의 얼굴로 도원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더 이상 규칙도, 섬의 평화도, 원망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딸을 향한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
도원은 그 눈빛을 마주하며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화가 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해볼게요."
"...부탁한다."
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자락이 흔들리며 그 흐릿한 얼룩이 다시 도원의 눈에 들어왔다. 잠시 도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스스로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손은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가 돌아서기 전, 도원이 물었다.
"촌장 할아버지는 이 사실을 아세요?"
누의 걸음이 멈췄다. 등을 보인 채로, 그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안다."
"그런데 왜 아저씨를 처벌하지 않아요?"
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섬에서는, 신의 뜻을 대신 행한 자는 벌하지 않는다. 그것이 규칙이다."
"그 규칙, 누가 정했어요?"
"...촌장님의 아버지, 그 위의 아버지, 그 위의 위의 아버지."
"아주 오래됐네요."
"그래. 아주 오래됐다."
"오래된 규칙이라고, 다 옳은 건 아니잖아요."
누는 잠시 멈췄다. 그 침묵이 길었다. 도원은 그 등을 바라보며,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그래. 옳지 않을 수도 있지."
그것이 마지막 대답이었다. 누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자갈 밟는 소리가 마당 끝에서 골목으로, 골목에서 다시 더 먼 어둠으로 흩어졌다.
도원은 혼자 남아 오래도록 마당에 앉아 있었다. 나무 밑동의 습기가 옷 속까지 스며들었지만,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밤벌레 소리는 여전했다. 파도 소리도 여전했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도원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완전히 뒤틀려 버린 것 같았다.
손바닥의 미열이 다시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엔 희미했다. 그러다 점점 뚜렷해졌다. 마치 그 열기가, 방금 들은 이야기에 반응하는 것처럼.
요아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조심해. 무엇을 조심하라는 걸까.
도원은 그 짧은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조심해. 조심해. 되뇔수록 그 말의 무게가 달라졌다. 처음 들었을 때는 단순한 경고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안에 훨씬 더 많은 것이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 대답이, 방금 누가 남긴 이야기 속에 이미 있었는지도 몰랐다.
촌장. 규칙. 대대로 이어진 침묵. 그리고 매번 아홉 명 중 하나를 미리 정해두는 이가 있다는 사실.
도원은 문득 궁금해졌다. 올해,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또 누구를 정했을까.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로 끝난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별이 유독 밝게 떠 있던 그 자리를, 도원은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 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변하지 않는 밝기로,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마당 저편,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끝에서, 무언가가 다시 움직인 것 같았다. 도원은 순간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