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단 한 번의 소환

1화

바람이 절벽 위로 불어 올라왔다. 소금기. 마른 풀 냄새. 그리고 향불 타는 연기. 도원은 그 냄새들을 하나씩 세어보았다. 어릴 때부터 하던 버릇이었다. 냄새를 세면 무서운 것이 조금 덜 무서워졌다. 소금기, 마른 풀, 향불 연기, 그리고 촌장의 옷에서 나는 오래된 나무 냄새. 넷을 세었다. 다섯 번째는 자신도 몰랐다. 여섯 번째 냄새를 세기도 전에 촌장의 지팡이가 바닥을 울렸다. 웅— 낮은 울림이 절벽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발밑의 돌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원은 그 떨림을 신발 밑창을 통해 느꼈다. 아홉 아이가 일렬로 서 있었다. 도원은 맨 끝이었다. 요아는 그 옆이었다. 요아가 도원의 손을 슬쩍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무섭지 않아." 요아가 작게 말했다. "나도." 도원이 대답했다. 둘 다 거짓말이었다. 도원은 요아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요아도 마주 잡았다. 두 손 다 떨리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런 순간엔 손을 잡는 것으로 충분했다. 말은 필요 없었다. 촌장은 흰 천을 두르고 있었다. 등이 굽었지만 눈빛은 흐리지 않았다. 그는 절벽 끝에서부터 걸어와, 아홉 아이를 한 명씩 눈으로 훑었다. 걸음은 느렸다. 지팡이가 돌바닥을 짚을 때마다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첫 번째 아이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아이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원 앞에서 그의 걸음이 유독 길게 멈췄다. 도원은 그 눈빛을 마주 보지 못했다.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촌장의 발이 다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걸었다. 제단은 검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오래 젖었다가 마른 자국이 돌 표면에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자국은 마치 오래된 지도 같았다. 누군가는 그 자국이 바다의 모양을 닮았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것이 죽은 자들의 이름이라고 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위에 작은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안에 무엇이 담겼는지는 아이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 모두 알고 있었다.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안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아홉 명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대해신께서 아홉을 고르셨다." 촌장이 말했다. "고름을 받은 아이는 초령이 된다. 고름을 받지 못한 아이는 그대로 산다." 아이들 중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다시 한번 불었다. 이번엔 조금 더 세게. 아이들의 옷자락이 일제히 한쪽으로 쓸렸다.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파도는 평소보다 검었다. 촌장의 지팡이가 다시 한번 바닥을 두드렸다. 웅— 소리가 아니라 진동이었다.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 도원은 무릎이 살짝 꺾이는 것을 느꼈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요아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손바닥 사이에 땀이 배었다. 항아리 뚜껑이 열렸다. 붉은 것이 담겨 있었다. 짙고 걸쭉한, 피였다. 냄새가 순간 훅 끼쳤다. 쇠 냄새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도원은 그 냄새를 세지 못했다. 셀 수 없는 냄새였다. 제사장이 붓을 들었다. 붓끝이 항아리 속으로 잠겼다가 나왔다. 붉은 것이 붓끝에서 뚝 떨어졌다. 제사장은 첫 번째 아이 앞에 섰다. 붓끝이 이마에 닿았다. 아이의 몸이 흠칫 떨렸다. 두 번째, 세 번째. 붓끝이 스칠 때마다 아이들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중 한 아이는 작게 울음을 삼켰다. 다른 아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원의 차례가 왔다. 붓끝이 이마에 닿는 순간, 무언가가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감각이 있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아팠다. 둘 다였다. 도원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무언가가 보였다. 점. 선. 물결. 탑. 낯선 문양들이 눈꺼풀 안쪽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문양들은 순서 없이 나타났다가, 마치 물에 씻긴 듯 흐려지며 사라졌다. 도원은 그것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손이 닿기 전에 이미 다음 문양이 나타났다. "요아." 도원이 작게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도원은 처음엔 자신이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요아는 방금까지 손을 잡고 있었다. 방금까지 숨소리가 들렸다. 방금까지 옆에 있었다. 손바닥에는 아직 요아의 손 온도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원은 손을 뻗어 그 빈 공간을 만져보았다. 바람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다른 아이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손목에서 문양이 떠오른 것을 보고 소리쳤다. 문양은 마치 살갗 밑에서 번져 올라오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발밑의 흙이 물처럼 일렁이는 것을 보고 뒤로 넘어졌다. 넘어진 아이는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도 일어날 생각을 못 했다. 또 다른 아이는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별 모양의 문양을 보며 신기한 듯 만지고 또 만졌다. 아홉 아이 중 여덟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도원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흐릿했다. 그의 눈은 오직 요아가 서 있던 빈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자리엔 발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서 있지 않았던 것처럼. "요아가." 도원이 촌장을 향해 소리쳤다. "요아가 없어졌어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자신도 몰랐던 크기의 소리였다. 촌장의 얼굴에서 순간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놀람으로 보았다. 그런데 도원은 그것을 다른 것으로 보고 있었다. 슬픔이었다. 아니, 슬픔보다 더 오래된 무엇이었다. 마치 이미 몇 번이나 겪어본 일을 다시 마주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자리를 지켜라." 촌장이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할아버지." 도원이 다시 불렀다. 이번엔 아이가 아니라 손자로서 부른 것이었다. "요아 어디 있어요." 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그는 도원의 눈을 피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원이 아는 촌장은 언제나 눈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신 그는 제사장들을 향해 손짓했다. 남자 몇이 제단 뒤편의 천막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걷는 게 아니라 거의 뛰는 걸음이었다. 도원은 그들의 등을 눈으로 쫓았다. 천막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들엔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도원은 그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때 도원의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위로 붉은 선이 하나 떠올랐다. 곧 그 선 위에 작은 탑 모양의 문양이 겹쳐 그려졌다. 살갗 위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살갗 아래에서 배어 나오는 듯한 문양이었다. 문양의 윤곽이 선명해질수록 손바닥의 열기도 강해졌다. 웅— 그 울림이 이번엔 도원의 몸 안에서 났다. 도원은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뜨거움이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팔 전체가 저릿했다. 그리고 그 뜨거움 속에서, 아주 잠깐,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요아의 목소리였다. "도원아." 분명 그렇게 불렀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마치 물속에서 부르는 것처럼 웅웅거리며 울렸다. 도원은 고개를 들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여덟 명의 다른 아이들은 제 몸에 나타난 문양을 신기해하며 서로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 아이가 자신의 팔뚝을 다른 아이에게 들이밀며 자랑스럽게 무언가를 말했다.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방금." 도원이 옆의 아이에게 말했다. "방금 못 들었어?" 옆의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 팔에 나타난 물결무늬를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뭘?" 그 아이가 되물었다. "목소리." 도원이 말했다. "누가 불렀어."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 아이는 다시 자신의 문양으로 눈을 돌렸다. 도원은 더 묻지 않았다. 자신이 들은 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손바닥의 열기가 만든 환청인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도원은 다시 천막 쪽을 보았다. 남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누구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은 옷자락에 뭔가 묻어 있었다. 붉은 것이었다. 항아리 속의 것과 같은 색이었다. 도원의 숨이 잠깐 멈췄다. 촌장이 그 남자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짧게 말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짧았고, 낮았고, 아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걸음이 빨랐다. 거의 도망치는 걸음이었다. 도원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어깨의 각도, 걷는 방식, 옷자락이 흔들리는 모양까지 모두 낯설지 않았다. 누였다. 요아의 아버지였다. 도원은 그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요아가 어딘가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는 확신. 그리고 그 부름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뛴다는 감각보다는, 무언가가 안에서 두드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손바닥 위의 탑 문양이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원은 저도 모르게 손을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촌장은 아직 남은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다시 짚었고, 남은 아이들을 향해 무언가를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무거웠다. 그러나 도원의 눈에는 그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빈자리, 그리고 그 남자가 사라진 방향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도원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무언가를 물었다. 도원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귀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조금 전 들었던 목소리, 요아가 자신을 부르던 그 소리뿐이었다. 제단 위, 붉은 항아리는 이제 텅 비어 있었다. 바람이 다시 절벽을 타고 올라왔다. 이번엔 소금기도, 마른 풀 냄새도, 향불 연기도 아니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도원은 그 사실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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