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의식은 있어! 죽지 않았어!"
할머니가 소리치며 기범의 상처를 압박했다. 손이 피로 붉게 젖어 있었다. 그 손이 떨리는 걸 나는 봤다. 할머니 손은 원래 저렇게 떨리지 않는데.
"기웅! 함선 준비됐어?!"
"삼 분 걸립니다!"
"삼 분을 못 버텨!"
고연승이 총을 재장전하며 외쳤다. 손가락이 탄창을 끼우는 동작조차 다급했다.
캠프 전체가 아수라장이었다. 개체들이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처음엔 열, 그다음엔 스물, 이제는 숫자를 헤아리는 게 의미가 없었다. 안개 속에서 청색 눈빛들이 하나둘 켜지듯 떠올랐다. 그 빛이 늘어날수록 속이 뒤틀렸다.
나는 형의 피가 묻은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떨렸다. 이게 진짜야? 이 상황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게?
숨어 있어야 했는데. 몰래 지켜만 봤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적어도 이렇게 무력하게 서 있지는 않았을 텐데.
그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개체들은 몰려왔다. 발소리, 아니 발소리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그 둔중한 파열음이 사방에서 겹쳐 들렸다.
"도훈이는 뒤로 빠져!"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제 화를 낼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살아 있으라는 명령처럼 들렸다.
나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손목 단말기가 다시 진동했다.
[해독 모듈 - 통신 주파수 재감지 중]
아까 감지했던 그 신호였다. 개체들끼리 주고받는 어떤 패턴. 처음 감지했을 때는 그냥 잡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저것들은 서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폐 속까지 화약 냄새가 밀려들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무기를 든 것도 아니고, 힘이 센 것도 아니지만, 이건 할 수 있어.
"할아버지! 저놈들 하나의 신호로 움직여요! 제가 그거 잡을 수 있어요!"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낸 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게 들렸다.
할아버지가 개체 하나를 베어내며 나를 힐끗 봤다. 검이 개체의 몸통을 가르는 순간에도 시선은 정확히 내게 꽂혔다.
"...뭐?"
"통신 주파수요! 삼촌이 준 모듈로 잡히는데, 이거 역으로 이용하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개체 하나가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눈으로 좇기도 힘들 만큼 빨랐다.
"도훈아!"
최지훈이 몸을 던져 나를 밀어냈다. 그 자리에 개체의 발이 내리찍혔다.
콰앙!
땅이 갈라졌다. 흙먼지가 튀어 시야를 가렸다. 최지훈이 간발의 차로 몸을 굴려 피했다. 옷자락이 찢겨 나갔다.
"빨리!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중계기가 필요해요! 캠프 중계기에 연결하면—"
"내가 엄호할게! 가!"
최지훈이 무기를 고쳐 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등을 돌리기 직전, 나를 향해 딱 한 번 눈을 맞췄다. 살아있으라는 뜻이었다. 알아. 나도 살고 싶어.
나는 있는 힘껏 캠프 중앙으로 달렸다. 사방에서 전투음이 터졌다.
콰앙!
타앙!
서걱!
소리가 뒤섞여 정신이 아득했다. 발밑에 뭔가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개체의 잘려나간 팔이었다. 토할 것 같은 걸 억지로 참았다. 하지만 지금 멈추면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중계기 앞에 도착했다. 손이 너무 떨려서 연결 단자를 두 번이나 놓쳤다. 세 번째에 겨우 손목 단말기를 연결했다.
[해독 진행 중 - 예상 소요 시간 90초]
90초. 그 시간 동안 여기서 버텨야 한다. 90초가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도훈아!"
기웅이 소리쳤다. 함선 조종석에서 뛰어내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신호 해독하고 있어요! 삼십 초만 더!"
"삼십 초 동안 저놈들이 널 씹어먹기 전에 말이지!"
기웅이 옆에서 개체 하나를 저격했다.
타앙!
관절이 정확히 맞았다. 개체가 잠깐 균형을 잃었다. 기웅의 사격은 언제 봐도 소름 돋게 정확했다.
할아버지가 그 틈을 타 앞으로 나섰다. 진화 11단계의 진짜 실력이 드러났다.
한 번의 손짓, 두 번의 손짓, 세 번의 손짓.
개체 셋이 차례로 무너졌다. 마치 인형이 쓰러지듯 무게감 없이 쓰러졌다. 저게 사람이야 뭐야. 이 상황에서도 그런 감탄이 나오는 게 스스로도 웃겼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밀려왔다. 끝이 안 보였다. 안개 저편에서 또 다른 청색 눈빛들이 새롭게 떠올랐다.
[해독 진행 - 60% 완료]
조금만 더. 조금만.
할머니가 기범을 부축한 채 후방으로 물러났다. 기범의 다리가 힘없이 끌렸다. 고연승이 그 뒤를 엄호했다.
"버텨! 버텨야 해!"
고연승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이 든 몸으로 여기까지 버티는 것도 이미 한계에 가까워 보였다. 총을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해독 진행 - 85% 완료]
거의 다 됐다. 나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손목 단말기 액정이 진동할 때마다 심장도 같은 박자로 뛰었다.
그 순간, 땅이 다시 크게 울렸다.
이번엔 다른 종류의 진동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게감.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울림에 이가 떨렸다.
숲의 경계선 너머, 안개가 갈라지며 새로운 형체가 드러났다.
지금까지 본 개체들의 두 배는 되는 크기. 청색 눈빛도 더 짙고 강렬했다. 그 눈빛이 이쪽을 향하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저건 뭐야."
기웅이 중얼거렸다. 저격총을 쥔 손이 처음으로 멈췄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처음으로 완전히 굳었다. 지금까지 어떤 개체가 나타나도 흔들리지 않던 그 얼굴이었다.
"...지휘 개체다."
그 두 단어가 캠프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총성도, 비명도 잠시 멎었다.
그 존재가 천천히 캠프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마다 땅이 흔들렸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흙먼지가 튀어 올랐고, 그 진동은 내가 딛고 서 있는 중계기 바닥까지 전해졌다.
[해독 진행 - 100% 완료]
단말기에서 알림이 떴다. 나는 화면을 봤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주파수 패턴이 해독됐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정보가,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건 명령 신호가 아니었다.
하나의 거대한 존재가, 이 모든 개체들의 감각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시야, 청각, 통증까지도. 저 아래 개체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저 지휘 개체의 손발이자 눈이었다.
다시 말해, 저 지휘 개체 하나를 쓰러뜨리지 않는 한, 이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할아버지!"
나는 그 사실을 소리쳐 알렸다.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지휘 개체는 이미 캠프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거대한 몸이 그림자를 드리우자, 캠프 전체가 순식간에 어둠 속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