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금지된 각성, 나는 살아남았다

4화

그림자들이 안개를 뚫고 완전한 형체를 드러냈다. 곤충과 파충류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외형. 검은 갑각에 덮인 몸통 위로, 여러 개의 팔다리가 관절을 접듯 움직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부드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난 게 아니라, 뭔가에게 그렇게 설계당한 것처럼. 키는 최소 오 미터. 눈이라 할 만한 부위에서 옅은 청색 빛이 새어나왔다. 그 빛이 나를 향한 것 같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니야, 아직 발각 안 됐어.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다. "전투 진형."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캠프 전체에 퍼졌다.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그 목소리 하나에 캠프의 공기가 바뀌었다. 형들이 각자 위치로 흩어졌다. 기웅은 함선 조종석으로 뛰어올랐다. 기범은 최전방으로 걸어나갔다. 걸음걸이가 평소와 다르게 무거웠다. 고연승과 최지훈이 방어선 양쪽 끝을 잡았다. 서로 눈짓 한 번 주고받는 게 다였다. 굳이 말이 필요 없는 사이라는 게 그 짧은 눈빛에서도 느껴졌다. 할머니는 후방에서 통신 장비를 붙들고 있었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이 거리에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무 뒤에서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생체 신호 개체 수 - 2,447 - 여전히 증가 중] 숫자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았다. 저게 다 하나씩 저 청색 눈을 갖고 있다는 거지. 상상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첫 개체가 달려들었다. 빠르다. 사람의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속도였다. 다섯 미터짜리 덩치가 저런 속도로 움직인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콰앙! 기범이 정면에서 맞받았다. 대지 각성자답게 발밑 지면이 순간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충격을 흡수했다. 그런데도 기범의 몸이 뒤로 몇 미터 밀려났다. 신발 밑창이 땅을 갈며 긴 자국을 남겼다. "...힘이 말도 안 돼." 기범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팔뚝에 힘줄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두 번째 개체가 옆에서 튀어나왔다. 첫 번째와는 다른 각도, 다른 속도였다. 마치 첫 공격이 미끼였다는 듯이. 서걱! 최지훈의 무기가 갑각을 긁었다. 상처는 얕았다. 갑각이 그만큼 단단했다. "안 뚫려!" 최지훈이 소리쳤다. 목소리에 짜증과 당황이 섞여 있었다. "약점을 찾아!" 고연승이 소리쳤다. 지팡이형 총을 정확히 겨눠 발사했다. 타앙! 탄환이 개체의 관절 부위를 맞췄다. 그제야 개체가 잠깐 움찔했다. "관절이다! 관절 부위를 노려!" 그 외침이 방어선 전체에 퍼졌다. 형들의 공격 방향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갑각이 아니라 그 사이, 관절이 접히는 틈으로. 하지만 그 사이 세 번째, 네 번째 개체가 접근했다. 숫자로 밀어붙이는 방식이었다. 하나를 상대하는 사이 다른 둘이 빈틈을 만들고, 그 빈틈으로 또 다른 개체가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직접 전선에 나섰다. 진화 11단계의 몸놀림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수준이었다. 발이 땅에 닿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한 번의 손짓으로 개체 하나의 팔다리를 끊어냈다. 서걱! 하지만 그 자리에 또 다른 개체가 채워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를 메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듯이. "숫자가 문제가 아니야." 할아버지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처음으로 어떤 감정이 섞였다. 짜증이 아니라, 경계였다. "이놈들 전부가 하나의 지휘를 받고 있어."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나무 뒤에서 몸을 떨었다. 하나의 지휘. 그 말은, 이게 무작위 습격이 아니라 조직된 공격이라는 뜻이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만약 저것들이 하나의 신호로 움직인다면, 그 신호를 잡아낼 수 있다면. 손목 단말기가 진동했다. [해독 모듈 - 개체 간 통신 주파수 감지]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손끝이 저절로 단말기 화면을 향했다. 하지만 지금 뛰어나가면 발각된다. 발각되면 할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할지 뻔했다. 그 눈빛이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졌다. 왜 여기 있냐, 왜 숨어 있었냐, 그런 질문들. 지금은 답할 수 없는 것들. 나는 단말기를 다시 품 안으로 눌러 넣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지켜보자. 그 순간, 캠프 외곽 방어선이 뚫렸다. 한 개체가 후방으로 우회해 할머니 쪽으로 달려들었다. 다른 개체들이 전방을 붙잡고 있는 사이, 그 하나가 옆으로 빠져나온 거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다는 것처럼. "할머니!" 내 입에서 저절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숨어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다리가 이미 뛰고 있었다. "도훈아?!" 기웅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움과 경악이 섞인, 짧게 끊긴 외침이었다. 나는 있는 힘껏 달렸다. 슈트의 은신 모드가 강제로 해제됐다. [은신 모드 - 강제 해제] 화면에 그 문구가 떠오르는 걸 보면서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 앞으로 뛰어들었다. 개체의 팔이 이미 코앞이었다. 그 팔 끝에 달린 갑각이 빛을 받아 번뜩였다. 피할 시간이 없었다. 그때, 옆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나를 밀쳤다. 콰앙! 둔탁한 충격음. 내 대신 그 자리에 있던 건 기범이었다. "형!" 기범의 몸이 그대로 튕겨나갔다. 개체의 팔이 그의 옆구리를 그대로 관통했다. 서걱. 피가 튀었다. 붉은 액체가 초록빛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그 색이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기범이 땅에 쓰러졌다. 몸이 한 번 튀어 오르듯 흔들리다가 그대로 멈췄다. "기범아!"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캠프 전체가 순간 멈춘 듯했다. 형들의 무기 소리도, 개체들의 움직임도, 모든 게 한 박자 늦게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내 발밑에서 형의 피가 번지고 있었다. 검은 땅 위로 붉은 웅덩이가 조금씩 커지는 걸, 나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나 때문이야." 입에서 그 말이 새어나왔다.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기범이 힘겹게 눈을 떴다. 나를 봤다. 그 눈빛에 원망이나 분노 같은 건 없었다. 그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넌... 왜 여기..."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눈이 다시 감겼다. 의식을 잃은 것뿐인지, 그 이상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손이 형의 피에 젖어드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할머니가 뒤에서 내 어깨를 붙잡았다.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숲의 경계선에서, 더 많은 그림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청색 빛이 하나, 둘, 셀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저것들의 지휘자는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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