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피 속 백만 생령

4화

칼끝이 옷깃을 가르고 지나가는 감각은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다. 서늘하다는 느낌이 먼저 왔고, 그다음에야 옆구리 쪽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이 뒤늦게 따라붙었는데, 나는 그 낙차 사이에서 이상하게도 침착함을 느꼈다. '아, 이게 진짜 베인다는 감각이구나.' 한강 물살에 휩쓸릴 때는 이런 걸 느낄 새도 없었으니, 어쩌면 나는 죽음의 순서를 거꾸로 밟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는 물이 폐로 밀려드는 감각이 전부였고, 통증 같은 사치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이번엔 순서가 반대인 셈이다. 먼저 차갑고, 그다음에 뜨겁고, 그리고 아마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겠지. 죽음도 이렇게 예의를 차려주는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윤서린을 품 안으로 끌어당긴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칼끝이 다시 들어올 틈은 없었지만, 마차 벽 너머에서 병사들의 신음과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오는 걸 보면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누군가의 비명이 짧게 끊겼고, 그다음엔 둔탁한 낙하음이 이어졌다. 사람 하나가 쓰러지는 소리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는데, 그게 우리 편인지 적 편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윤서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두려움보다는 지시에 가까운 어조여서 나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 나이에 열다섯 살짜리 소녀에게 지휘를 받는 처지라니, 정말이지 웃음도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전생에서였다면 나이 서른 넘어 취업 준비생 코스프레를 하다가 인턴한테 업무 지시를 받는 것과 비슷한 굴욕감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런 자존심 따위를 챙길 겨를도 없었다. 마차가 급격히 기울며 옆으로 쏠리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윤서린의 머리를 감싸며 등으로 벽을 받아냈고, 둔중한 충격이 어깨뼈를 타고 척추까지 울려왔다.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내 입에서 나는 건지 마차 목재가 뒤틀리는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놈들이 말을 벤 것 같습니다!" 윤태호가 반대편에서 소리쳤는데, 그 목소리에서마저 계산이 느껴진다는 게 이 인간의 대단한 점이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저 남자는 손해와 손실을 따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말 몇 마리 값이 얼마고, 마차 수리비가 얼마고, 하는 계산을 저 아비지옥 같은 소음 속에서도 굴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묘하게 믿음이 갔다. 저런 인간은 쉽게 죽지 않는다. 계산이 끝나기 전까지는. 마차가 완전히 뒤집히기 직전, 나는 문틈으로 스며드는 붉은 불빛을 봤는데, 누군가 마차 뒤편에 불을 붙인 모양이었고, 그 열기가 훅 끼쳐오면서 목덜미의 털이 곤두섰다. 나무 타는 냄새와 함께 뭔가 탄내가 섞여 들어왔는데, 그게 살 타는 냄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속이 뒤틀렸다. 이번에도 죽을 뻔했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몸이 붕 떠올랐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혔다. 등짝이 통째로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이 지나갔고, 잠깐 숨이 멎었다가 다시 터져 나왔다. 충격으로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도 나는 옆구리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봤는데, 이상하게도 그 피가 어둠 속에서 옅은 은빛을 띠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피가 빛난다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이런 환각을 보다니,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정신을 붙잡으려 했지만 손끝의 떨림이 점점 커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손가락을 오므려보려 했는데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마치 회선이 끊긴 전화기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윤서린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고, 마차 밖에서는 여전히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이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는데, 그 모든 소음이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멀어져 갔다. 누군가 내 몸을 흔드는 감각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점점 희미해졌다. 정신을 놓기 직전, 시야 한구석에 문장 같은 것이 떠올랐다. 흐릿하고 반투명한 글자였는데, 마치 게임 로딩 화면처럼 무심하게 떠 있었다. [경고: 과다 출혈이 감지되었습니다. 생명 반응이 임계치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문구를 보며 이런 순간에도 시스템 흉내를 내는 이 세계의 성실함에 실소했는데, 죽어가는 사람한테까지 팝업창을 띄워주는 배려심이라니, 참으로 프로페셔널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실소가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완전히 검게 뒤덮였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마차 안이 아니었다. 발밑에는 바닥이라 할 것도 없었고, 그저 새하얀 무(無)의 공간이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백색은 대리석의 광택도 아니고 눈의 결정도 아닌, 표현하기 힘든 순수한 색이었다. 소리도 없었고, 냄새도 없었고, 심지어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이 죽음 이후의 세계인가 싶어 잠시 서글퍼졌지만, 서글퍼할 겨를도 없이 다른 감각이 밀려들었다.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팔다리의 감각이 흐릿했고, 대신 시야 저편에서 무수한 점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처럼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것들은 각기 다른 빛깔과 떨림을 가진 작은 불씨들이었고,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아서 마치 은하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어떤 불씨는 파랗게, 어떤 것은 붉게, 또 어떤 것은 거의 흰색에 가깝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 각각이 마치 심장처럼 미세하게 박동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게 뭐지.' 나는 속으로 물었지만 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소리 없는 진동이 전해져 왔다. 목소리라기보다는 감각으로 스며드는 정보였는데, 그것은 마치 오래된 문서를 통째로 머릿속에 들이붓는 느낌이었다. 페이지를 넘길 새도 없이 활자가 뇌리에 직접 새겨지는 것 같은, 지독하게 불쾌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백만의 넋이 너의 혈관을 타고 흐른다.' 그런 문장이 뇌리에 박히듯 새겨졌고, 나는 그 말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백만 명의 넋이라니, 이건 무슨 자기소개서에 쓸 법한 과장인가 싶었지만, 눈앞의 무수한 불씨들이 하나같이 옅게 흔들리며 나를 향해 기울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그게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저것들이 정말로 넋이라면, 나는 지금 그 백만 개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는 셈이었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는데, 육체가 없는 이 공간에서도 그런 반응이 가능하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나는 저 불씨 중 하나에 손을 뻗어보려 했지만, 그 순간 세계 전체가 진동하며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종이 울리는 것 같은 파동이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관통했고, 불씨들이 일제히 밝기를 높였다가 사그라들었다. "강도현! 눈을 뜨십시오!" 누군가 내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고,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백색의 공간에서 튕겨 나오듯 현실로 끌려 올라왔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뒤집힌 마차의 잔해 사이로 스며드는 붉은 화광이었고, 그다음으로 보인 건 윤서린의 얼굴이었는데, 평소의 담담한 표정이 무너져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눈가가 살짝 젖어 있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그녀가 물었지만 그 목소리는 이미 절반쯤 갈라져 있었다. 나는 대답하려 입을 열었지만, 그 대신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여러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만이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한 넷, 어쩌면 그 이상이었고, 저마다 다른 속도와 무게로 잔해 위를 밟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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