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능력, 내가 베낀다

3화

그림자가 골목 안으로 한 발 더 들어왔다. 안호는 숨을 완전히 죽였다. 골목 바닥에 깔린 젖은 종이 상자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곰팡이와 빗물이 섞인 냄새였다. 거기에 희미하게, 탄내가 겹쳐 들어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뭔가가 계속 타고 있다는 뜻이었다. 검은 긴팔 남자의 손등에서 흐르던 전류가, 파지직- 소리를 내며 손목까지 타고 올라갔다. 그 빛이 골목 벽에 짧게 반사됐다. 파란빛과 흰빛이 뒤섞인 색이었다. 안호는 그 빛만 보고도 목덜미가 저릴 정도였다. 남자의 시선이 골목 안쪽을 훑었다. 느릿하게, 한 칸씩 옮겨가는 시선이었다. 바닥에 쌓인 쓰레기 더미, 깨진 화분, 녹슨 배관. 그 순서를 따라가던 눈이, 안호가 웅크린 상자 근처를 스쳤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제발.' 그러다 안호를 정확히 지나쳐, 반대편 골목 끝을 향했다. 숨이 턱 밑에서 겨우 멈췄다. "거기 있는 거 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억양이 거의 없어서, 사람의 말인지 기계음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안호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골목 반대편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존재가 스르륵 걸어 나왔다.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바닥을 딛는 게 아니라 미끄러지는 것처럼 움직였다. 키가 작고 마른 여자였다. 역시 검은 긴팔. 옷자락 끝이 젖어 있었다. 빗물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두 눈이 완전히 흰색으로 덮여 있었다. 동공도, 흰자도 구분이 안 되는 새하얀 눈이었다. 그 눈이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정작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초념신. 그녀가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안호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곧장 울렸다. 『화염신은 처리했어. 다음은 저쪽 구역이야.』 안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목소리가 귀로 들어온 게 아니었다. 머리 안쪽, 정확히는 관자놀이 뒤쪽에서 그냥 생겨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을 읽는 게 아니라, 생각 속으로 목소리를 밀어넣는 능력이었다. '저게 사람 머릿속에 대놓고 들어온다고?'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감각이 지나갔다. 뇌신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명이나 죽었어." 『집계 중. 최소 열둘.』 숫자가 너무 가볍게 오갔다. 마치 재고 목록을 확인하는 말투였다. 안호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뇌신의 눈이 다시 골목 안쪽을 향했다. 이번엔 정확히 안호가 숨은 방향이었다. 안호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느꼈다. '걸렸다.' 【경고: 각성 개체가 100미터 범위 내로 진입했습니다.】 【복제 가능 능력이 감지되었습니다: 뇌전 발생, 사념 전달.】 【재사용 대기시간이 남아있어 복제가 불가능합니다.】 안호는 헛웃음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 눈앞에 그렇게 강한 능력이 두 개나 있는데,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그야말로 진열장 안에 갇힌 채,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구경하는 신세였다. '하다못해 저 전류라도 빌릴 수 있으면.'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시스템은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다는 듯, 아무 응답도 내놓지 않았다. 뇌신이 몇 걸음 더 다가왔다. 발밑에서 젖은 시멘트 바닥이 조용히 눌리는 소리가 났다. 안호는 손을 뻗어 옆에 쌓인 종이 상자를 조용히 끌어당겼다. 상자 겉면이 눅눅해서 손바닥에 미끄러운 감촉이 남았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상자 뒤에 웅크렸다. 무릎이 바닥에 닿아 차가운 물기가 스며들었다. 숨소리조차 조절하려 애썼다. 들이쉬고, 참고, 아주 조금씩 내쉬었다. 가슴이 압박되는 느낌이 계속됐다. 뇌신이 걸음을 멈췄다. 골목 한복판, 안호가 숨은 곳에서 채 세 걸음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 거리가 지금 안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처럼 느껴졌다. 초념신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민간인. 위협 아님.』 뇌신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 "확인은 해야지." 손끝에서 전류가 다시 튀었다. 파직, 파지직.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안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턱이 저절로 덜덜 떨렸다. 허벅지 근육이 완전히 굳어서, 도망치려 해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도로 저편에서 다시 폭발음이 터졌다. 쾅! 땅이 짧게 흔들렸다. 발밑으로 진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화염신이 완전히 처리된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건물 하나가 또 붉게 물들었다. 하늘 절반이 순식간에 주황빛으로 번졌다. 뇌신이 혀를 짧게 찼다. "저 새끼, 아직 살아있었네." 『서둘러.』 초념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뇌신은 마지막으로 골목 안쪽을 한 번 더 훑고, 몸을 돌렸다. 그 시선이 안호가 숨은 상자 위를 한 번 더 지나갔다. 느낌상으로는 그랬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안호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안호는 그 자리에 한동안 웅크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다리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등이 상자에 눌린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저게 다 신령 각성자라는 건가.' 서울 전역에 저런 존재가 몇이나 더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화염신 하나로도 이 난리인데, 뇌신과 초념신까지 겹치면 도시가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다. 거기다 방금 그 여자, 초념신은 직접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생각을 그냥 심어놓는 능력이었다. 그런 게 세상에 몇이나 더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현재 각성 포인트: 12점.】 【목표까지 남은 포인트: 988점.】 【남은 기한: 29일 21시간.】 숫자가 눈앞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988점을 채우려면, 방금 같은 순간을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하는지 계산하기도 싫었다. 방금은 능력을 쓰지도 못하고 숨기만 했다. 이런 식이면 점수는 영원히 12점에서 멈춰 있을 것 같았다. 안호는 상자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우선은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골목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박물관 그룹 채팅방이었다. [이재원] 안호 씨, 지금 어디예요? 괜찮아요? [이재원] 관장님이 지금 난리 났어요. 오늘 안 나오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안호는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헛숨을 내뱉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이 불에 타 죽은 마당에, 관장은 여전히 출근 걱정을 시키고 있었다. 세상이 이런데 근태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 밑으로 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박범수] 야, 너 이거 봤냐. 지구 전체에 이상한 게 나타난다는데. [박범수] 뉴스 말고 딥웹 쪽 정보 좀 봐봐. 진짜 심각해. 안호는 그 메시지를 잠시 노려보다가, 화면을 그대로 꺼버렸다. 지금은 뉴스도, 딥웹도, 관장의 눈치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당장 눈앞에서 사람 열두 명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온 참이었다. 박물관 출근 걱정을 할 정신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골목 끝에서, 검은 옷의 그림자 두 개가 다음 블록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주황빛 하늘이 그 뒤를 배경처럼 물들이고 있었다. 안호는 그 반대 방향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다가, 등 뒤에서 다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 발소리는 아니었다. 바람에 종이가 쓸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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