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능력, 내가 베낀다

2화

골목 벽에 등을 기댄 채, 안호는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두통이라기보다는, 뭔가 빠져나간 뒤의 텅 빈 느낌이었다. 정신력이라는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눈꺼풀이 무겁게 처졌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미세한 떨림이 팔뚝을 타고 올라와 어깨까지 퍼졌다. 몸을 지탱하던 힘이, 방금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정신력 회복률 87%.】 【정보 안내를 시작합니다.】 글자가 눈앞에 그대로 떠 있는 게 아니라, 시야 한쪽 구석에 새겨진 것처럼 존재감이 뚜렷했다. 안호는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뭔데, 대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고객님께서 사용하신 능력은 '화염 방출 (기초형)'입니다.】 【해당 능력은 백 미터 범위 내 각성 개체의 능력을 실시간 복제하는 초신 보조 시스템의 기본 기능입니다.】 안호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사람 손이었다. 손가락을 천천히 접었다 펴 보았다. 방금까지 불을 뿜었던 그 손이 맞나 싶었다. 손등에 남은 검댕 자국이, 그게 사실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꿈은 아니었네.' 【다만 안내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그 문장이 또 나왔다. 안호는 이번엔 미간을 좁혔다. '또 그 소리야.' 이 시스템은 좋은 소식을 말할 때 절대 저 문장을 쓰지 않는다는 걸, 안호는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복제 능력은 1회 사용 후 재사용 대기시간이 발생합니다.】 【현재 재사용 대기시간: 23시간 59분 41초.】 숫자가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게 보였다. 41초, 40초, 39초. 안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루 종일 못 쓴다는 거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머릿속으로 계산이 돌아갔다. 지금부터 정확히 하루. 그 안에 화염신 같은 게 또 나타나면, 자신은 아무것도 못 하고 지켜만 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가슴 안쪽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능력 사용 1회당 정신력이 소모됩니다.】 【정신력이 완전히 소진될 경우, 강제 수면 상태로 전환되며 신체 방어 능력이 0에 수렴합니다.】 "그건 죽으라는 말이잖아." 방금 도로 한복판에서, 정신력이 다 떨어졌다면 그 자리에 쓰러졌을 거란 얘기였다. 건물 잔해 아래서, 아무 방어도 없이. 머릿속에서 장면이 다시 그려졌다. 무너지는 콘크리트, 자욱한 먼지, 그 사이에서 정신을 잃고 널브러진 자신의 몸.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손바닥에 배어 있던 땀이 다시 식었다. '십 초만 늦게 정신력이 떨어졌어도, 나 지금 이 자리에 없었어.' 안호는 그 생각을 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얇은 줄 위를 걷고 있었는지 실감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폐 안쪽이 매캐한 먼지 냄새로 가득 찼다. 콜록, 짧은 기침이 새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안내가 있습니다.】 안호는 이번엔 숨을 죽였다. 뭔가 더 나쁜 게 남아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시스템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나쁜 소식 뒤에 더 나쁜 소식을 붙이는 식. 【초신 보조 시스템은 30일 이내에 일정 기준치 이상의 각성 능력을 축적하지 못할 경우, 강제 회수됩니다.】 【목표 축적치: 각성 포인트 1,000점.】 【현재 보유 포인트: 12점.】 안호는 벽에 뒤통수를 박았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쿵. "…십이 점." 방금 건물 하나를 막아낸 대가가, 십이 점이라는 소리였다. 목표까지는 앞으로 988점이 더 필요했다. 서른 날 안에. 숨이 얕게 뱉어졌다. 하루에 필요한 포인트를 대충 나눠보니, 하루에 삼십 점 이상을 벌어야 하는 계산이 나왔다. 방금 그 정도의 재난을 막고도 십이 점밖에 안 됐다면, 대체 어떤 일을 해야 삼십 점이 채워지는지 감도 안 잡혔다. '회수되면 어떻게 되는데.'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답이 떠올랐다. 【회수 시, 복제된 능력은 즉시 무효화되며 고객님의 신체는 원래 상태로 복귀합니다.】 【단, 회수 직전까지의 부상 및 손상은 복구되지 않습니다.】 안호는 숨을 짧게 내뱉었다. 한 마디로, 능력을 쓰다가 얻은 상처는 그대로 남고, 정작 능력만 사라진다는 소리였다. 제일 최악의 조건으로 이용당하다 버려지는 셈이었다. "이게 무슨 프로모션이야, 사기지." 말을 뱉으면서도, 이 말을 들어줄 상대가 없다는 게 더 씁쓸했다. 고소를 걸 수도 없고, 환불을 요청할 창구도 없었다. 그냥 이 몸으로, 이 조건으로, 서른 날을 버텨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안호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셔츠 소매가 찢어진 자리로, 긁힌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말라붙은 핏자국 위에 새로 흘러나온 피가 겹쳐 붙었다. 이것도 회수되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는 소리였다. '십이 점짜리 상처네.' 혼자 비웃듯 중얼거렸다. 골목 밖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소방차 사이렌과 경찰의 확성기 소리가 섞여서, 도로 전체가 아우성이었다. 누군가의 비명이 짧게 끊겼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뒤따랐다. 안호는 무릎에 팔을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손가락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화염신은 어딘가에서 여전히 날뛰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화염신 말고도, 이 도시엔 더 있을지 몰랐다. '또 있으면 어떻게 해.' 답을 알고 있었다. 재사용 대기시간이 끝나기 전엔, 아무 능력도 못 쓴다. 맨몸으로 버텨야 한다는 뜻이었다. 칼 든 놈이 나타나도, 총 든 놈이 나타나도, 지금의 안호는 그냥 사람이었다. 능력이 사라진 손. 그 손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답이 안 나왔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에 들어가, 시야가 순간 흐릿해졌다. 눈을 깜빡이며 다시 초점을 맞췄다. 그때, 골목 초입에서 발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느긋하고 규칙적인 걸음이었다. 도망치는 사람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안호는 몸을 벽에 바짝 붙였다. 숨소리마저 죽였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세게 두드렸다. 쿵. 쿵. 골목 입구로, 그림자 하나가 길게 늘어졌다. 검은 긴팔 옷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안호는 숨을 참았다. 방금 화염신을 걷어찼던 그 검은 옷의 존재가, 지금 이 골목 앞에 서 있었다. 발소리가 멈췄다. 그 자리에서, 그저 안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손끝 대신, 그 사람의 손등에서 파지직- 하는 전류가 흘렀다. 푸른 빛이 짧게 손등을 타고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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