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왕궁 사절이 온다는 소식이 떨어지자 저택 전체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하녀들은 복도를 뛰어다니고, 집사는 은식기를 하나하나 닦아가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그 광경을 방 창문으로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결혼식도 아니고 대리인 방문 하나에 이 난리라니.
이서연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왕태자 이신우와는 어릴 때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였다. 정략혼이었으니 애정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기억 속 이신우는 표정 없는 얼굴로 짧게 인사만 하고 돌아섰던 소년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한테 별 관심 없어 보였다는 게 유일하게 남은 인상이었다.
다행히 이번엔 이신우가 직접 오는 게 아니라 그쪽 대리인이 온다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아직 그 남자를 직접 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원작에서 목이 잘리는 여자로서, 목을 자를 남자를 실물로 마주하는 건 심리적으로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다혜의 도움을 받아 저택 사람들의 정보를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누가 이서연에게 우호적인지, 누가 적대적인지, 누가 그냥 눈치만 보고 있는지. 게임 지식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원작 스토리는 학원 입학 이후부터가 본편이었고, 그 전 3개월은 배경 설정으로만 짧게 스쳐 지나갔으니까. 말하자면 나는 지금 게임 튜토리얼도 안 끝난 상태로 하드모드 보스전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 집 정원사는 원래 후작가 사람이었는데, 아가씨가 예전에 화분을 걷어차서 크게 다치신 적이 있어요."
"내가? 화분을 왜 걷어차."
"그건 저도 몰라요. 아무튼 그날 이후로 그분은 아가씨만 보면 슬슬 피하세요."
"…화분 사건은 나중에 따로 알아봐야겠네."
다혜는 그런 식으로 하나씩 정보를 물어왔다. 누구는 이서연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고, 누구는 이서연이 시킨 심부름 때문에 겨울에 맨발로 밖에 나갔다 온 적이 있고. 듣다 보면 원작 이서연이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였으면 그렇게는 못 살았을 텐데.
"아가씨, 요즘 좀 달라지신 것 같아요."
다혜가 어느 날 차를 내오며 말했다.
"어떻게 달라졌는데?"
"예전엔 화만 내셨는데, 지금은… 뭔가 계획적이세요."
"계획적인 게 이상한 건가."
"아뇨, 좋은 쪽으로요."
나는 픽 웃었다. 사실 지난 한 달 가까이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남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근신 사건 이후로 하녀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아버지 앞에서도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려 애썼다. 원작 이서연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사건들을 하나씩 되짚어보고, 그 사건이 실제로는 조작이거나 오해라는 걸 밝혀내는 식으로 저택 내 평판을 조금씩 바꿔갔다.
예를 들면 세탁실 하녀가 이서연 때문에 손목을 다쳤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알아보니 실제로는 세탁실 기계가 낡아서 생긴 사고였다. 나는 그 사실을 조용히 확인한 다음, 아버지 앞에서 지나가는 말처럼 세탁실 기계를 바꿔달라고 청했다. 아버지는 별말 없이 승낙했고, 그 이후로 세탁실 하녀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거창한 선행도 아니고 그냥 낡은 기계 하나 바꿔준 건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움직이는구나 싶었다.
작은 성취들이었지만 확실히 쌓이고 있었다. 하녀 몇몇은 더는 나를 피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예전보다는 덜 차갑게 대했다. 물론 애정이 생긴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정치적 도구 취급을 받으면서도 무시당하지는 않게 됐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성적표였다.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히든 업적 몇 개 딴 수준이라고 해두자.
문제는 학원 입학이 두 달도 안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청연 귀족 학원. 게임의 진짜 무대. 그곳에서 이신우와 한소이의 만남이 시작되고, 이서연의 처단 서사가 본격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노력은 말하자면 예열 운동에 불과했다. 진짜 시합은 학원 정문을 넘는 순간부터 시작될 거였다.
"다혜, 학원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많이는 모르지만… 올해 신입생 중에 특이한 소문이 하나 있어요."
"소문?"
"어느 남작가에 숨겨둔 딸이 있었는데, 사실은 귀족 신분이라는 게 최근에 밝혀졌다던데요. 그래서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입학한다고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한소이.
게임의 여주인공이 마침내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작대로라면 그녀는 학원에서 이신우를 만나고,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클리셰를 완성시키며, 그 과정에서 이서연을 최종적으로 처단대에 세운다. 게임 할 때는 그렇게 재밌던 클리셰가, 내가 그 클리셰의 제물이 될 처지가 되니 이렇게 무섭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아니,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원작 타임라인이 자동으로 재생되고 있었으니까. 입학식, 첫 만남, 오해와 갈등, 그리고 서서히 좁혀지는 두 사람의 거리. 그 모든 장면 뒤에 항상 배경처럼 깔려 있던 건 이서연의 몰락이었다. 나는 그 배경 캐릭터의 몸에 들어와 있는 거고.
아직 시간이 있었다. 정확히는 두 달. 그 안에 나는 뭔가를 결정적으로 바꿔야 했다. 지금까지 해온 저택 내부 평판 관리는 어차피 학원이라는 진짜 전장에서는 크게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었다. 학원은 완전히 다른 룰로 돌아가는 곳이니까.
"…다혜."
"네, 아가씨."
"그 남작가 영애 이름이 뭐라고 했지?"
"한소이라고 들었어요. 왜, 아시는 분이세요?"
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이 세계에서 나는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결말을 만들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순진하고 착한데 그 착함이 결국 남들을 파멸시키는, 그런 여자애.
"…아니, 그냥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서."
다혜는 더 캐묻지 않고 조용히 찻잔을 치웠다. 아마 내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챘겠지만, 다혜는 그런 걸 굳이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무던함이 지금은 고마웠다.
창밖으로 저녁 햇살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두 달 뒤, 저 학원 정문을 넘는 순간부터 진짜 게임이 시작될 거였다. 그리고 그 게임의 끝에는 내 목이 걸려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오랫동안 그 붉은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은 곱디곱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내 속은 그것과 정반대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살아야 했다. 어떻게든, 이번엔 다르게.
문득 왕궁 사절이 오는 날짜와 학원 입학식 날짜를 겹쳐 계산해봤다. 사절이 저택에 머무는 동안 이신우 쪽에서 이서연에 대한 첫 인상을 다시 정리할지도 몰랐다. 대리인이 어떤 말을 전하고 어떤 눈으로 나를 볼지, 그것부터가 벌써 하나의 시험대였다.
그리고 그 시험대를 넘기고 나면, 곧바로 한소이라는 이름의 진짜 보스전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