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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별채 뒷문 열쇠는 화단 옆 벽돌 틈에 숨겨져 있었다. 이서연의 기억이 알려준 정보였는데, 신기하게도 그 기억만은 또렷했다. 몸이 기억하는 습관이라는 게 이런 걸까. 머리로는 하나도 모르는데 손이 먼저 벽돌을 더듬어 열쇠를 찾아낸다. 마치 자동으로 로그인되는 게임 계정처럼. 문을 열고 나가는데 손이 떨렸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별채 뒷마당은 낮에 봤던 것보다 훨씬 넓었고, 정원수 사이로 좁은 길이 하나 나 있었다. 이 길로 몰래 빠져나가서 어디를 갔던 걸까. 이서연은. 궁금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하녀 숙소 방향을 짐작해서 걸었다. 복도 등불이 하나둘 꺼져 있는 시간이었고,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움직였다. 그러다 복도 모퉁이에서 사람 그림자와 마주쳤다. "…아가씨?" 젊은 시녀였다. 얼굴 절반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붕대 위로 등불 그림자가 일렁였다. 아, 이 사람이구나. 내가 때렸다고 소문이 났던 그 하녀. "괜찮아?" 내 물음에 그녀 눈이 더 커졌다. 손에 든 촛대가 살짝 흔들렸다. 아마 이서연이었다면 이런 질문 자체를 안 했을 거다. 걱정하는 말투로 말을 걸었다는 것 자체가 이 저택에서는 뉴스거리인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존댓말이긴 한데 문장 하나하나에 벽이 있었다. 손님 대하듯, 아니 그보다 더 사무적으로. 나는 잠깐 서서 그 벽을 어떻게 두드려야 하나 고민했다. 그냥 정면으로 부딪히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내가 정말 화병을 던졌어?" 다혜의 표정이 흔들렸다. 촛불이 그 흔들림까지 비춰줬다. "…왜 그런 걸 물으세요." "기억이 안 나서." 반쯤은 진심이었다. 이서연의 기억이 통째로 내 것이 된 건 아니었으니까. 마치 남이 저장한 세이브파일을 불러온 느낌이랄까, 어떤 장면은 생생하고 어떤 장면은 아예 로딩이 안 됐다. "…아가씨가 아니었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뭐?" "그날 저는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거예요. 근데 마침 그때 아가씨가 근처에 계셔서, 다른 사람들이 아가씨 짓이라고 말을 지어냈습니다." 와.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화가 치솟았다. 손끝까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나를 이용해서 이서연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거였다. 그것도 최소한의 사실 확인조차 없이. 목격자도 없이, 심증만으로, 그냥 원래부터 그런 애니까 그랬을 거라는 편견 하나로. "그럼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 "…말해도 아무도 안 믿어주니까요. 이 저택에서 아가씨 편은 아무도 없거든요." 다혜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 말투에 원망보다는 씁쓸함이 더 짙게 섞여 있었다. 원망할 힘도 이미 다 써버린 사람의 말투였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이 사람이 게임 속 로그에서 이서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하녀였다. 그 증언 한 줄 때문에 이서연의 평판이 얼마나 더 나락으로 갔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증언은 자의가 아니라 강요된 것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게임은 결과만 보여줬지, 그 결과 뒤에 뭐가 있었는지는 한 줄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지금 사실대로 말해준 거." "아뇨, 사실 저도 아가씨가 겁이 나서 말 못했던 거예요. 아가씨는… 늘 무서운 분이었으니까요." 무서운 분. 그 세 글자에서 이서연의 원래 성격이 어땠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신경질적이고 히스테리에 가깝다던 원작 설정. 텍스트로만 읽었을 땐 그냥 캐릭터 성격 태그 정도로 넘겼는데, 지금 이 시녀에게는 실제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붕대 감은 얼굴로 밤중에 마주친 것만으로도 몸이 굳는 그런 트라우마. "앞으로는 안 그럴 거야." 말이 툭 튀어나왔다. 계산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다혜가 눈을 크게 떴다. "…네?" "앞으로는 안 무섭게 할게. 대신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요." 경계하는 목소리였다. 당연했다. 어제까지 화병을 던졌다고 소문난 아가씨가 갑자기 다정하게 말을 걸면 누구든 의심부터 할 거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있는 그대로만 말해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진실만." 다혜가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뭔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이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오늘만 이런 건지 내일도 이럴 건지, 그런 걸 재는 눈빛. "…이상하시네요, 오늘 아가씨."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어제까지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정확히는 다른 세계, 다른 인생, 다른 취미와 다른 야근시간을 살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날 밤 다혜는 촛불을 든 채로 한참 서 있었다. 뭔가 결심하는 표정이었다. * 결국 다혜는 그날 밤 공작에게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공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실대로 고했다고 한다. 자기가 계단에서 미끄러진 거고, 아가씨는 그저 근처에 있었을 뿐이라고. 다른 하녀들이 지레짐작으로 소문을 냈다고. 다음 날 근신이 예정보다 빨리 풀렸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을 때, 나는 잠깐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멍하니 있었다. 근신 풀렸다는 통보 하나로 이렇게 홀가분해질 수 있다니. 마치 게임에서 페널티 스테이지 하나를 스킵권 써서 넘긴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차갑게 대했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식사 자리에서도 몇 마디 안 했다. 그래도 적어도 억울한 죄목 하나는 벗어났다. 하나씩. 이렇게 하나씩 지워나가면 언젠가는. 그 뒤로 다혜는 내 전담 시녀가 됐다. 처음엔 형식적인 배치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서연이 유일하게 마음을 연 존재, 아니 정확히는 내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신뢰한 사람이었다. "아가씨,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짧은 인사였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이 저택에서 완전히 혼자였던 내가, 처음으로 편이 하나 생긴 순간. 별거 아닌 인사말인데도 가슴 한쪽이 조금 따뜻해졌다. 원작 시나리오에서는 이런 장면 자체가 없었다. 없던 관계를 하나 만든 거다, 내가. 그런데 그날 밤, 다혜가 조심스럽게 흘린 정보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옷장을 정리하다 말고, 별생각 없이 던진 말투였다. "아가씨, 곧 왕궁에서 사절이 온다고 들었어요. 왕태자 전하의 정혼 관련해서요." 손이 멈췄다. 왕태자. 이신우. 게임 속에서 아직 만난 적 없는 그 남자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원작 타임라인대로라면 아직 한참 남았어야 할 인물인데. 벌써? 왜 벌써? 다혜는 내 표정이 굳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 등을 보면서, 지금까지 익혀온 원작 지식이 얼마나 쓸모없어질지 어렴풋이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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