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버지의 사부가 된 아들

4화

그날 밤, 도윤은 평소보다 더 오래 우물가에 머물렀다. 달빛이 우물물 위에 부서져 은빛 조각처럼 흩어졌다. 바람은 자고, 마당 한구석의 감나무 잎사귀만 이따금 사르륵거렸다. 도윤은 두 손을 배 위에 얹고 눈을 감았다. 등에 새겨진 문양이, 이제는 스스로 부르지 않아도 옅게 반응했다. '이 정도면... 초입 단계는 넘긴 것 같다.' 정확한 명칭은 몰랐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처음보다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체감으로 알 수 있었다. 팔다리에 힘이 붙었고, 숨이 더 길어졌으며, 관절이 삐걱거리던 소리도 사라졌다. 예전에는 문양을 자극하고 나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지금은 숨 한 번 고르면 그대로 잠들 수 있을 정도였다. '몸이 그릇이라면... 그릇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도윤은 손바닥을 펼쳐 손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은 열네 살 소년의 작고 통통한 손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기운은, 예전 본좌가 다스렸던 거대한 흐름의 아주 작은 조각이라는 것을, 그 자신만은 알고 있었다. '서두르지 말자.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거늘.'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이건우는 마당에 쌓인 장작더미를 옮기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 도윤이 아무렇지 않게 장작 한 다발을 통째로 들어 옮기는 모습을 본 것이다. 평범한 아이라면 낑낑대며 두세 개씩 나눠 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도윤은 마치 짚단을 옮기듯 가볍게, 별생각 없이 그것을 들어다 헛간 옆에 척 내려놓았다. '저게... 대체.' 이건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아들의 동작을 계속 지켜보았다. 손에 쥔 도끼는 어느새 그의 옆구리에 늘어져 있었다. 오랜 세월 무공을 익힌 눈이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여러 가지 셈이 빠르게 오가고 있었다. '힘이 어른 못지않다. 게다가 저 자세... 짐을 들어 올리는 순간의 무게 중심이 흔들리지 않아.' 도윤은 그 시선을 느꼈다. 등 뒤에서 따갑게 꽂히는 눈길이었다. '아, 이런.' 일부러 장작을 옮기다 발을 헛디뎌 몇 개를 떨어뜨렸다. "아이고!" 우당탕, 장작이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겉으로는 서툰 실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계산된 연기였다. 넘어지는 각도까지 미리 재어 둔, 그야말로 완벽한 실수였다. '너무 눈에 띄었나.' 도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버지가 무사라는 걸 자꾸 잊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의 눈은 일반인보다 훨씬 예리했다. 산속에서 십 년, 이십 년을 검과 함께 산 사람이 어디 보통 사람의 눈을 가졌겠는가. '조금만 더 조심해야겠구먼. 이러다간 마을 사람들 앞에서 진기를 뿜어내는 참사가 일어날지고.' "도윤아." 이건우가 낮게 불렀다. 도끼를 바닥에 세워 놓고, 아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요즘 몸이 좋아진 게냐?" 도윤은 흩어진 장작을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딴청을 부렸다. "그, 그런가요? 그냥... 밥을 잘 먹어서 그런가 봐요." 도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다행히 이건우는 그것까지 알아채지는 못한 듯했다. "밥을 잘 먹어서, 라..." 이건우가 팔짱을 끼고 아들을 응시했다. 그 눈빛 속에는 의심 대신 다른 것이 스쳤다. 절벽 사고 이후로 아들이 눈에 띄게 씩씩해졌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밤에 벌레 소리에도 놀라 이불을 뒤집어쓰던 아이였다. "...그래, 밥이 보약이지." 이건우는 잠시 아들을 응시하다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이미 의심이 아니라 다른 것, 옅은 기대감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아들이 자신도 모르는 재능을 타고났을지 모른다는, 무사로서의 오래된 미련 같은 것이었다. 도윤은 그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숨을 몰래 내쉬었다.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 넘어갔구먼.' 한소영도 그날 오후 빨랫감을 개면서 슬쩍 도윤을 살폈다. 볕이 좋은 마당에 널어놓았던 옷가지를 걷어 마루에 앉아 개는 그녀의 손끝이, 문득 멈추었다. "요즘 눈빛이 달라진 것 같아."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개던 저고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마당 구석에서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아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더 어른스러워졌달까." 도윤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마당 구석에서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딴청을 부렸다. 사실은 두 귀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열려 있었다. '어머니마저 눈치를 채면 곤란해지는데.'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손짓이 조금 더 어설프게, 조금 더 아이답게 커졌다. 일부러 균형을 잃은 척 두어 번 비틀거리기도 했다. 한소영은 그런 아들을 보며 피식 웃고는 다시 빨랫감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넘어갔군. 하나 언제까지 이렇게 숨길 수 있을지는...' 도윤의 속으로 옅은 한숨이 지나갔다. 오후가 되자 도윤은 마을 어귀 공터로 향했다. 흙먼지가 마른 바람에 실려 발끝에 감겼다. 곽대웅과 그 무리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소문이 퍼진 모양인지, 또래 아이들 몇 명이 멀찍이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팔짱을 끼고 히죽거렸고, 몇몇은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 눈치를 살폈다. "왔네, 겁쟁이." 곽대웅이 팔을 걷어붙이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미 승패가 정해졌다는 듯한, 오만한 웃음이었다. "어디 절벽에서 떨어져도 안 죽는 놈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 볼까." "나, 난 그냥 얘기하러 왔는데..." 도윤이 뒷걸음질치며 겁먹은 얼굴을 만들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는 것까지, 영락없는 겁쟁이 아이의 몸짓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상대의 체격과 자세를 훑고 있었다. '어깨가 앞으로 굽어 있다. 오른손잡이. 발을 넓게 벌리고 서 있지만, 무게 중심이 뒤쪽에 실려 있다. 첫 주먹은 오른손이겠지.' '게다가 저 눈빛. 상대를 이미 이겼다고 착각하는 눈이구먼. 저런 눈을 가진 자는, 첫 반격에 대응하는 법을 모르는 법이거늘.' "얘기는 무슨." 곽대웅이 성큼 다가와 도윤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손등에 힘줄이 불끈 섰다. "이 마을에서 제일 재능 없는 놈이 어디서 잘난 척이야." 주변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낮게 속삭였다. "쟤 진짜 절벽에서 떨어지고 나서 이상해졌다며." "그러게, 눈빛이 좀 무섭던데." 곽대웅의 오른손이 주먹을 쥐며 뒤로 당겨졌다. 손목을 살짝 비트는, 힘을 모으는 동작이었다. '온다.' 도윤은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심장은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몇 초 전 상체의 각도, 발의 각도, 시선의 방향까지 모두 예측대로다. 이 정도면... 눈감고도 피할 수 있겠구먼.' 주먹이 날아드는 순간, 도윤의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산악구조대에서 배운 회피 동작이, 이제는 훨씬 강해진 몸과 만나 전혀 다른 속도로 재현되었다. 그는 상체를 살짝 비틀어 주먹을 흘려보냈다. 휙—! 곽대웅의 팔이 허공을 갈랐다. "어?" 곽대웅이 당황한 얼굴로 균형을 잃었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그가 딛고 있던 흙바닥에 발자국이 어긋나게 찍혔다.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둘러서 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뚝 끊겼다. '여기서 넘어지는 척 해야 하나, 아니면...' 도윤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넘어지는 시늉을 하며 이쯤에서 상황을 마무리 짓는 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곽대웅이 이미 두 번째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이번엔 피할 여유가 없었다. 곽대웅의 눈에는 이미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첫 주먹이 빗나간 것을 자존심의 상처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 눈빛 속에서 도윤은, 이제 물러설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는 것을 직감했다. 도윤의 몸이 자연스럽게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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