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버지의 사부가 된 아들

3화

그날 이후, 도윤은 매일 밤 우물가에서 홀로 손목의 문양을 살폈다. 낮에 시도하면 남의 눈에 띌 위험이 있었으니, 밤이 가장 안전했다.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강민준으로 살았던 시절의 습관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산에서 배운 것은 무모함이 아니라 절제였다. 무엇이든 급하게 다루면 사고가 난다. 산악구조대에서 수백 번을 되뇌었던 말이었다. 우물가는 밤이면 인적이 없었다. 두레박 줄이 삐걱거리는 소리, 멀리서 개 짖는 소리, 그리고 도윤 자신의 숨소리뿐이었다. 그는 우물 턱에 걸터앉아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달빛이 손목의 문양 위로 옅게 내려앉았다. 처음 볼 때는 그저 흐릿한 얼룩 같았는데, 이제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미세한 선들이 얽혀 있는 게 보였다.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양 같기도 했고, 강줄기가 갈라지는 모양 같기도 했다. '문양이 아니라 지도였구나.' 도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몸속 어딘가로 이어지는 지도.' 며칠간의 관찰로 도윤은 몇 가지를 알아냈다. 문양은 그가 호흡을 특정한 방식으로, 즉 배 아래 단전에 의식을 모으고 천천히 내려보낼 때만 반응했다. 처음에는 그저 손목이 미미하게 따뜻해지는 정도였지만, 반복할수록 반응은 점점 뚜렷해졌다. 반응이 강할수록 몸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빠르게 순환했고, 그 순환이 끝난 뒤에는 몸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마치 오래 묵은 근육의 뭉침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산에서 열두 시간짜리 구조 작전을 마치고 온천에 몸을 담갔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다만 이번엔 온천이 아니라 제 몸 안에서, 스스로 그 뜨거운 기운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이건 경락을 여는 과정이다.' 도윤은 숨을 길게 내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무공에서 말하는 화기경이 이런 식으로 열리는 걸까.' 도윤은 자신이 익혔던 한의학의 경락 이론과, 성현대륙의 무공 체계가 정확히 맞물려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인체의 열두 정경과 기경팔맥, 산에서 응급처치를 위해 외웠던 그 지식들이 여기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몸에 새겨진 문양은, 경락의 흐름을 남들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무언가겠지.' 물길을 막고 있던 둑이 허물어지듯, 정체돼 있던 무언가가 트여 나가는 감각이었다. 그는 손목을 몇 번 접었다 펴며 그 감각을 곱씹었다. 하지만 여기서 신중해야 했다. '이전 도윤이 왜 수련에 실패했는지, 왜 재능 없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게 있는데도.' 이전의 도윤은 이 문양의 존재를 알았을까, 몰랐을까. 알았는데도 열지 못했다면 방법이 문제였을 것이고, 몰랐다면 이건 순전히 우연히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며 얻은 행운이었다. 어느 쪽이든 답을 얻을 방법은 없었다. 몸의 원래 주인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그는 이 힘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세상 물정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힘을 보여준다는 건, 산에서 랜턴 없이 밤 등반을 하는 것과 같았다. 무모한 일이었다. '서두르다 굴러떨어지면, 다음엔 정말 죽는다.' 다음 날부터 그는 위장에 들어갔다. 마당에서 뛰어노는 척, 나뭇가지를 검처럼 휘두르는 아이 놀이를 하며 실제로는 근육을 이완시키고 기의 흐름을 조율하는 동작들을 섞었다. 겉보기엔 그저 검객 흉내를 내는 철없는 아이였다. "이야압!" 도윤은 나뭇가지를 크게 휘두르며 우스꽝스러운 기합을 내질렀다. 동작은 크고 어설펐지만, 그 안에서 어깨와 팔꿈치, 손목의 각도는 정확히 계산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부모님 눈에는 그저 철없는 아들의 장난처럼 보였다. "도윤이가 요즘 부쩍 밝아졌네." 한소영이 빨래를 걷으며 웃었다. 젖은 옷가지를 탁탁 털어 널면서 그녀의 시선은 마당을 뛰어다니는 아들에게 자주 머물렀다. "다친 게 오히려 약이 됐나 봐. 예전엔 방구석에만 있던 애가." "그럴지도 모르지." 이건우가 짐짓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눈은 아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좇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마루 기둥에 등을 기댄 자세였는데, 시선만은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시선을 도윤은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사다. 눈이 예사롭지 않아.' 도윤은 나뭇가지를 놓치는 척 툭 떨어뜨렸다. 허둥지둥 주워 드는 동작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저 정도면 됐나.' 그는 아버지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다행히 이건우의 얼굴엔 별다른 의심이 없었다. 그는 일부러 동작을 더 어설프게, 넘어지고 헤매는 척 위장했다. 겉으로는 서투른 아이, 속으로는 정밀하게 근육과 관절의 각도를 계산하는 이중의 움직임이었다. 밤이 되면 다시 우물가로 향했다. 낮의 위장과 밤의 진짜 수련, 두 가지 삶을 하루 안에 겹쳐 사는 셈이었다. '낮엔 배우, 밤엔 수련생이다.' 도윤은 속으로 자조하듯 웃었다. '본좌가 이런 이중생활을 하게 될 줄이야.' 일주일이 지나자 변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손목 하나 겨우 버티던 팔이, 이제는 물동이 두 개를 나눠 들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릴 때 두레박 줄을 당기는 손아귀 힘도 눈에 띄게 늘었다. 그럼에도 그는 물동이를 나르다 일부러 한쪽을 살짝 기울여 물을 조금 흘렸다. 마당에 물이 튀며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어이구, 저 녀석." 한소영이 혀를 차며 다가와 마른 걸레로 마당을 닦았다. "힘은 세지는데 손끝은 여전히 야무지지 못하네." '너무 완벽하면 의심을 산다.' 도윤은 속으로 되뇌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엄마... 미안해요." 목소리까지 기어들어가게 낮췄다. 그렇게 며칠, 도윤은 밤마다 우물가에서 문양을 자극해 기운을 순환시키고, 낮에는 놀이로 위장한 훈련을 반복했다.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산악구조대 시절 다져진 근육의 기억이, 이 작은 몸에 서서히 되살아나는 듯한 감각이었다. 가끔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숨을 고르기도 했다. 성현대륙의 밤하늘은 지구와는 별자리가 달랐지만, 별의 밝기만큼은 산 정상에서 보던 것과 비슷했다. 그 낯설고도 익숙한 하늘 아래서, 도윤은 문득 이전 삶을 떠올리곤 했다. 로프와 헬멧, 동료들의 무전 소리. 이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감상은 나중에. 지금은 몸을 만들 시간이다.' 그날도 그는 마당 구석에서 낮은 자세로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하는 쪼그려 뛰기 놀이처럼 보였겠지만, 실제로는 하체 근력을 정밀하게 단련하는 방식이었다. 무릎이 발끝을 넘지 않도록, 허리가 굽지 않도록, 하나하나 각도를 맞춰가며. 이마에 땀이 배어났다. 서른 번쯤 반복했을 때, 담장 너머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도윤!" 도윤이 고개를 돌리자, 낯선 소년 셋이 삐걱거리는 싸리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문짝이 힘없이 흔들리며 마른 나무 냄새를 풍겼다. 맨 앞의 덩치 큰 소년이 팔짱을 낀 채 도윤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에는 대놓고 무시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곽대웅..." 몸이 자동으로 그 이름을 떠올렸다. 원래 도윤이 남긴 기억의 흔적이었다. '적하촌에서 제일 텃세가 심한 놈이라고 했지. 나이는 동갑인데 덩치는 한 뼘은 더 크고, 아비가 마을 경비대 소속이라 뒷배가 있다고도 했다.' "오늘도 마당에서 혼자 검 놀이나 하고 있냐?" 곽대웅이 비웃었다. 그는 마당 안으로 몇 걸음 더 들어와 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문 들었다. 절벽에서 떨어졌다며. 그러고도 안 죽었으니 용하네." 뒤에 선 두 소년이 낄낄거렸다. 그중 하나가 팔꿈치로 다른 하나를 쿡 찌르며 말했다. "저 정도 재능 없는 놈이 죽었으면 오히려 편했을 텐데." "맞아, 매번 수련 시간에 제일 굴러다니는 놈이잖아." 다른 소년이 맞장구쳤다. "사부님도 포기했다는 얘기 들었어." 도윤은 겉으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그런 말 하지 마..." 목소리 끝을 살짝 떨리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체격, 체중, 무게중심.' 도윤은 곽대웅의 걸음걸이를 눈으로 훑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상체가 살짝 앞으로 쏠렸다. '저놈은 힘은 좋지만 하체가 둔하군. 무릎 회전이 느려. 저 나이 또래 애들이 다 그렇지만.' 산악구조대에서 위험 인물을 상대할 때 몸에 새긴 습관이 그대로 발동했다. 상대의 체형과 습관을 먼저 읽고, 대응 방식을 정하는 것.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길지,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저놈들 셋 다 덤벼도 지금이면 별 문제 없다. 그런데 그걸 지금 보여줄 필요는 없지.' "내일 마을 어귀 공터로 나와." 곽대웅이 손가락을 튀기며 말했다. 딱, 소리가 제법 컸다. 자기 딴엔 위협적으로 보이려 애쓴 몸짓이었다. "거기서 다시 보자고. 못 나오면 겁쟁이인 줄 알 테니까." "온 마을에 소문내 줄게. 이도윤이 검도 못 잡는 겁쟁이라고." 뒤에 선 소년 하나가 덧붙였다. 그 말을 던지고 세 소년은 웃으며 사라졌다. 싸리문이 다시 삐걱거리며 닫혔다. 도윤은 그들이 사라진 싸리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마당에는 아직 그가 서 있던 자리에 흙바닥이 얕게 눌린 흔적만 남아 있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겁먹은 아이의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다른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놈, 힘 조절을 전혀 모른다. 하체 회전도 느리고, 무엇보다 성급하다. 저런 놈을 다루는 법은 산에서도 익히 배웠지. 급한 놈은 급하게 무너지는 법이거늘.' 도윤은 손목의 문양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낮이라 옷소매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밑에서 은은한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게 느껴졌다. '내일이라... 좋다. 딱 알맞은 실험대가 되겠구나.' 그는 다시 마당 구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번엔 아까와는 다른 리듬이었다.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깊게. 내일을 위한 준비였다. 멀리서 저녁을 짓는 냄새가 실려 왔다. 찐 감자 냄새와 장작 타는 냄새가 뒤섞인, 낯설지만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지는 이 세계의 냄새였다. 도윤은 그 냄새를 맡으며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내일 저 마을 어귀 공터에서, 곽대웅 저놈이 무엇을 보게 될지 궁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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