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우산을 돌려받은 건 그로부터 채 사흘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도경 자작가 저택 앞으로 배달된 물건이 다름 아닌 그 우산이었고, 그것도 새것처럼 손질되어 고급 리본으로 포장되어 있는 걸 보고 나는 이게 단순한 물건 반환인지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 순간 헷갈렸다. '우산 하나 돌려주는데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일 필요가 있나. 이 정도면 세탁소가 아니라 장인한테 맡긴 거 아니야?'
집사가 상자를 열어 보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이거 어디서 온 물건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대충 골목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얼버무렸는데, 집사의 표정이 순간 의미심장하게 변하는 걸 보고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괜히 이상한 오해 사기 전에 화제 전환.' 상자 안에는 우산 말고도 작은 종이봉투가 하나 더 들어 있었는데, 열어보니 값싼 사탕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우산은 고급스럽게 포장하고 사탕은 이렇게 소박하게 넣다니, 이 사람 균형감각이 좀 특이하네.'
함께 딸려온 짧은 쪽지에는 단정한 필체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이름만 적혀 있었는데, 그 필체가 지나치게 또박또박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마치 서체 교본에서 그대로 베껴온 것 같은, 흐트러짐 하나 없는 글씨였다. '이 정도 필체면 성격도 어지간히 깐깐하겠구나 싶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면 또 다를 수도 있으니.' 나는 쪽지를 서랍 한 켠에 넣어두고는 그날의 일을 딱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물건 하나 돌려받은 것뿐인데 뭘 그렇게 곱씹나 싶기도 했고, 자작가 딸로서 챙겨야 할 다른 일들이 산더미였으니까.
그 우연이 다시 겹친 건 왕립 학원 도서관에서였다. 시험 기간을 앞두고 자료를 찾으러 서가 사이를 헤매던 나는 책장 몇 개를 오가며 필요한 문헌을 뒤지다가, 구석 자리에 앉아 홀로 책을 펴놓고 있던 강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앉은 자리 주변으로 쌓인 책의 높이가 다른 학생들의 두세 배는 되어 보여서 나는 그가 학년 수석이라는 소문이 결코 헛말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책상 위에는 각기 다른 색깔로 표시된 책갈피들이 규칙적으로 꽂혀 있었는데, 그 정돈된 모양새를 보니 저 사람은 뭘 하든 대충 하는 법이 없는 성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뵙네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는 책에서 눈을 떼며 짧게 고개를 숙였는데, 그 반응이 지난번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아서 나는 나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골목에서 마주쳤던 그 무뚝뚝한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는 표정은 그보다는 확실히 온도가 높았다.
"공부 중이셨나 봐요." 뻔한 말을 건네면서도 나는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노트를 슬쩍 훑어보았는데, 필기가 지나치게 꼼꼼해서 마치 시험 대비가 아니라 전공서 저술을 준비하는 것 같은 수준이었다. 페이지마다 여백까지 빼곡하게 채워진 주석들, 그리고 색이 다른 잉크로 구분된 강조 표시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 사람 진짜 천재구나. 나였으면 저 절반도 못 채웠을 텐데.'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노트를 살짝 덮으며 옅게 웃었는데, 그 웃음이 처음 골목에서 봤던 무표정과는 사뭇 달라서 나는 순간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아서요." 그가 대답했고,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아 자료를 찾는 동안 자연스럽게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저는 아직 뭐부터 봐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강태오 학생은 벌써 이만큼이나." "그냥 습관이에요. 뭐든 미리 정리해두는 게." 그의 대답은 짧았지만 어딘가 자기 방어적인 뉘앙스가 섞여 있어서, 나는 저 습관이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어떤 필요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받았다. '뭐든 미리 정리해둔다는 건, 어쩌면 실수를 용납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의 습관 아닐까.'
우리는 서가 사이를 오가며 필요한 책을 찾아주기도 하고, 서로 아는 강의 정보를 나누기도 했다. 그가 손을 뻗어 높은 서가의 책을 꺼내주는 순간, 나는 그의 팔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걸 느끼고 잠깐 시선을 돌렸다. '괜히 이상한 데 신경 쓰지 말자.'
대화 중간 그가 문득 자신의 소맷자락을 매만지며 시선을 내리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 손목에 언뜻 스친 붉은 흔적을 나는 못 본 척 넘겼다. '저건 뭔가 신경 쓰이는데. 멍인지 상처인지 잘 안 보이지만, 저번에도 소매를 저렇게 만졌던 것 같은데.' 물어보고 싶었지만 처음 몇 번 마주친 사이에 개인적인 상처를 캐묻는 건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냥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강태오 학생은 원래 도서관에 자주 오세요?" "네, 거의 매일요." "친구분들이랑 같이 오시는 편이에요?" 그 질문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혼자 오는 게 편해서요."
그 뒤로도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짧게 주고받았는데, 그가 학원 안에서 유독 혼자인 시간이 많다는 걸, 그리고 그 혼자인 시간을 굳이 채우려 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식당에서도 늘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있다더라, 동아리 활동도 전혀 하지 않는다더라 하는 소문들이 스쳐 지나갔는데, 그 순간에는 그냥 조용한 성격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 거니까 굳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창밖으로 해가 조금씩 기울어가는 게 보였고, 도서관 안의 다른 학생들도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슬쩍 시계를 확인하고는 이만 자리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노트와 책을 순서대로 챙기기 시작했는데, 그 손놀림이 어찌나 절도 있는지 마치 훈련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훈련도 받은 것 같은데.'
헤어지기 전 그가 문득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도서아 양은, 저를 무서워하지 않으시네요." 그 말이 어딘가 이상해서 나는 되물었다. "무서워할 이유가 있나요?" 그러자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정리했는데, 그 짧은 침묵 속에 담긴 어떤 무게가 나에게 묘하게 남았다. 그 짧은 몇 초 동안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가 서가 사이로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설마 다른 사람들은 저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건가.' 강 공작가의 삼남이라는 신분, 그리고 소문으로만 들어본 그 가문의 냉랭한 분위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학원 내에서도 강 공작가 사람들은 다들 슬슬 피해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단순히 신분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그때까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강태오가 게임 속에서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도 그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를 무서워하지 않으시네요, 라니. 그럼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볼 때 어떤 표정을 짓는다는 걸까.' 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학원 담벼락을 바라보며 괜히 손목을 매만졌다. 그의 손목에 스쳤던 그 붉은 흔적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나는 문득 전생의 게임 화면 속 캐릭터 목록을 다시 떠올려보려 애썼다. 주인공과 얽히는 남주들의 얼굴이며 이름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지만, 강태오라는 이름이 그 안에 있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안 해본 루트였나. 아니면 그냥 조연이었나.' 별 생각 없이 넘겼던 그 밤의 의문이, 훗날 얼마나 서늘한 진실로 되돌아올지 그때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지만, 이상하게도 낮에 봤던 그 짧은 침묵의 무게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대답하지 못한 질문 하나를 방 안에 놓아둔 것처럼, 나는 그 밤 내내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