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0만 명 실종, 나만 남다

4화

눈을 떴을 때, 나는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하얀 공간에 서 있었다. 백색이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한, 색채랄 것도 없는 그 공간에는 바닥도 천장도 구분되지 않았고, 발을 디디고 있다는 감각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위도 아래도 아닌, 그냥 존재한다는 감각만 남아 있는 곳. 게임을 오래 하다 보면 로딩 화면이 유난히 하얗게 뜨는 순간이 있는데, 딱 그런 느낌이었다. 다만 이번엔 로딩 바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죽은 건가.'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눈앞에 다시 그 익숙한 시스템 창이 떠올랐는데, 이번엔 글자들이 훨씬 느리고 무겁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회선이 끊긴 인터넷에서 파일을 다운로드하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가 뜸을 들이며 나타났다. [생명 활동 위기 감지. 응급 회복 절차를 시행합니다.] 그 문구가 뜬 직후, 몸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재조립되는 듯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지는 것 같은 기묘한 통증이 스쳤다가 사라졌고, 등을 관통했던 그 날카로운 충격의 흔적도 서서히 희미해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몸 안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부서진 부품을 하나씩 갈아 끼우는 것 같았다. 아프다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시원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중간 지점의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나는 그 감각을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발버둥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 와중에 새로운 문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특수 조건 충족. 잠재 스킬 각성이 시작됩니다.] '잠재 스킬이라니, 그건 또 뭔데.' 의문이 들 새도 없이, 온몸의 감각 전체가 확장되는 듯한 느낌이 밀려들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이 공간 전체의 구조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층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 각 층마다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흩어져 있다는 감각적 인상이 머릿속에 압축된 이미지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거대한 탑의 단면도를 순간적으로 훑어본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탑이 몇 층까지 뻗어 있는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방대한 규모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저 압도당한 기분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세상이 이 구조물의 몇 층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이 구조물 자체가 내가 알던 세상 위에 얹혀 있는 건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압도적인 규모라는 인상만이 뇌리에 박혔다. [예리한 감각]이라는 이름 옆에 작은 괄호가 새로 붙었다. [예리한 감각] → [예리한 감각(강화)]. 설명은 짤막했다. '위협 감지 범위와 정밀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나쁘지 않은 보상이었다. 애초에 이 감각 하나로 지금까지 목숨을 몇 번이나 건졌는지 셀 수도 없었으니, 이게 강화된다는 건 순수하게 좋은 소식이었다. 다만 그 대가로 등에 창이라도 한 번 더 꽂혀야 하는 거라면, 나는 이 거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의향이 있었다. 의식이 다시 아득해지려는 순간, 나는 눈을 떴다. 이번엔 진짜 눈을 뜬 것이었는데, 등에 닿는 바닥은 차가운 대리석이었고 코끝에 스치는 냄새는 여전히 비릿한 습기였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렇게 축축하고 서늘한 형태로 돌아온다는 게 새삼 낯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가 등판 전체에 남아 있는 뭉근한 통증에 짧게 숨을 삼켰지만, 방금 전까지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의 부상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 정도는 거의 완치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손끝으로 등을 더듬어 봤지만 갈라진 상처의 흔적조차 만져지지 않았다. 옷은 여전히 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는데, 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했다. 이 부조화가 오히려 더 기분이 이상했다. '시스템이 살려준 건가, 아니면 그냥 게임 규칙상 죽이지 않은 건가.' 어느 쪽이든 고맙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이 시스템이라는 놈은 나를 살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 구간에서 죽이기엔 아직 볼 게 남았다고 판단한 것뿐일 수도 있었다. 사람 목숨을 콘텐츠 소비량으로 계산하는 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 넓은 공간에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천장은 여전히 높았고, 벽을 타고 흐르던 붉은빛 문양은 조금 흐려진 채로 은은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나를 습격했던 무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대신 바닥 곳곳에 검붉은 얼룩과 함께 낯익지 않은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얼룩은 이미 절반쯤 말라붙어 거뭇한 색으로 변해 있었고, 그 위로 몇 개의 발자국이 겹쳐 찍혀 있었다. 그 발자국들 중 일부는 분명 초록빛 형체의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크기의 신발 밑창 무늬였다. 밑창 모양을 뜯어보자면 격자 형태로 홈이 파인 디자인이었는데, 그건 확실히 그 초록색 것들이 신고 다닐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나 말고 누가 여기서 싸웠구나.' 그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놓이는 기분이었다. 이 미친 공간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확인, 그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엔 위안이 됐다. 물론 그 발자국의 주인이 나에게 우호적일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 가능성을 따질 여유조차 없었다. 발자국을 좀 더 살펴보려고 몸을 숙이는데, 무릎이 시큰거렸다. 몸은 회복됐다고 해도 근육 어딘가에는 아직 그 순간의 충격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지탱하며 발자국의 방향을 가늠했다. 발자국은 대체로 한 방향, 통로 안쪽으로 이어지다가 어느 지점에서 뚝 끊겨 있었다. 마치 그 지점에서 무언가에 의해 들려 올라간 것처럼, 아니면 순간적으로 사라진 것처럼. 그 끊긴 지점을 보고 있자니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이 공간에서는 사람도, 물건도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숨을 골랐다.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방금 몸으로 확인했으니, 이제부터는 전략을 바꿔야 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필요한 것만 챙긴다.' 은신과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는 방식으로 목표를 재설정하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무리하게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벽과 그늘을 이용해 최소한의 접촉만으로 다음 구간으로 넘어가는 게 나았다. 강화된 [예리한 감각]이 있으니 적어도 접근해오는 위협을 미리 알아차릴 확률은 높아졌을 터였다. 그 정도면 이 미친 구조물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보험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옷매를 대충 정리하고 벽을 짚으며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서 있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 정도면 됐다. 지금 이 상황에서 완전한 회복을 바라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나는 통로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다음 이동 경로를 가늠했다. 벽을 따라 붙어서 이동하면 최소한 시야 확보는 될 것이고, 저 발자국이 사라진 지점만 피해서 돌아가면 최악의 경우도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저 멀리 통로 안쪽에서 낮게 긁히는 듯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며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뭔가를 끄는 듯한, 아니면 무언가가 벽을 스치며 지나가는 듯한 그 소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면서 조금씩 내가 있는 방향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치 무거운 것을 질질 끌며 걷는 발걸음 같기도 했고, 딱딱한 껍질 같은 것이 대리석 바닥을 스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강화된 감각 덕분인지, 그 소리의 방향과 거리감이 예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잡혔다. 문제는 그 선명함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소리는 분명히, 그리고 확실하게,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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