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미로가 나를 키운다

4화

왼쪽 길 끝에서 나타난 건 다각충 세 마리였다. 아까 죽인 것보다 더 큰 크기, 다리가 여덪 개씩 있었다. 등딱지 색깔도 달랐다. 아까 놈들은 옅은 회색이었는데, 이번 놈들은 검붉은 색이었다. 마치 삶은 게딱지에 핏물을 부은 것 같았다. 판이 다시 정보를 알려줬다. [※ 개체 확인: 갑각다각충(변종) x3, 위험도: 중] 위험도가 하에서 중으로 올라간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숫자 하나 바뀌었다고 이렇게 무서울 일인가. 근데 실제로 무서웠다. 나는 부엌칼을 꺼내 쥐고 뒤로 물러섰다. 뒤에는 벽뿐이었다. 재구성된 복도, 돌아갈 곳이 없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칼자루를 쥔 손이 미끄러웠다. 나는 손바닥을 바지에 한 번 문지르고 다시 칼을 고쳐 쥐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다각충들은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다리 여덟 개가 각자 다른 박자로 바닥을 짚었다. 딱, 딱, 딱딱. 소리가 불규칙해서 더 신경이 곤두섰다. 한 마리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부엌칼을 앞으로 내밀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다각충의 다리 하나가 칼날에 걸렸다. 딱딱한 소리가 났다. 칼이 반쯤 부러졌다. 부엌칼도 못 버티는 상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터넷에서 검이라도 하나 주문할 걸 그랬다. 아니,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판단을 내려야 했다. 도망칠지, 싸울지.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세 마리가 반원을 그리며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왼쪽 놈은 이미 옆구리까지 붙었고, 오른쪽 놈은 다리 두 개를 들어올린 채 균형을 재는 것처럼 흔들거렸다. 나는 반쯤 부러진 칼을 다시 쥐고, 가장 가까운 놈의 다리 사이 몸통을 향해 찔러 넣었다. 각질이 갈라지는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물컹하면서도 딱딱한, 이상한 질감이었다. 마치 삶은 밤을 반쪼갠 것 같은 촉감. 놈이 크게 몸을 흔들었다. 나는 그 반동에 뒤로 밀려나며 벽에 부딪혔다. 등에 통증이 퍼졌다. 진짜 통증이었다. 이번엔 죽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다각충(변종) 1개체 처치] [경험치 획득: 15] [레벨업! 레벨 1 → 2] 판에 뜬 글자를 볼 여유는 없었다. 나머지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굴렀다. 돌바닥에 팔이 긁혔다. 아팠다. 이 아픔은 진짜였다. 팔꿈치에서 뜨끈한 게 흘렀다. 피인지 아닌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나는 굴러가는 와중에도 부엌칼을 놓지 않았다. 손에서 칼을 놓쳤으면 그 순간 끝났을 거다. 몸을 세우면서 두 번째 놈의 다리 하나를 베었다. 놈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나는 그 위로 몸을 던지듯 칼을 몸통 깊숙이 박아 넣었다. 놈이 발버둥을 쳤다. 다리 여덟 개가 동시에 허공을 긁었다. 나는 그 다리 중 하나에 뺨을 맞을 뻔했다. 고개를 돌려 피하면서도 칼은 계속 눌렀다. [다각충(변종) 1개체 처치] [경험치 획득: 15] 마지막 한 마리가 남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잡았다. 숨소리가 내 귀에도 크게 들렸다. 헉, 헉. 두 번의 죽음과 두 번의 처치를 겪고 나서야 숨을 고를 여유가 생긴 셈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걸 느꼈다. 팔이 조금 전보다 가벼웠다.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시야도 조금 더 밝게 보였다. 마치 안경을 새로 맞춘 것처럼, 복도 끝의 그림자 진 부분까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레벨업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몸이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게임 좀 해본 친구들이 레벨업 하면 캐릭터가 강해진다고 말할 때, 나는 그게 그냥 숫자 놀음인 줄 알았다. 근데 지금 이건 숫자가 아니라 몸으로 오는 감각이었다. 나는 마지막 다각충을 향해 먼저 달려들었다. 어제까지의 나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나는 원래 몸싸움을 피하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 운동장에서 다투는 애들을 보면 항상 뒤로 빠졌다. 근데 오늘의 나는, 정확히는 몇 분 전의 나보다 조금 더 빨랐고 조금 더 강했다. 칼끝이 놈의 몸통 정중앙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다각충(변종) 1개체 처치] [경험치 획득: 15] [레벨업! 레벨 2 → 3] 세 마리가 전부 각질과 체액이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냄새가 났다. 비린 것도 아니고 썩은 것도 아닌,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그 잔해 속에서 작은 결정체가 세 개 떨어져 있었다. 은은하게 파란빛이 도는, 구슬만 한 크기의 돌. 판이 다시 알려줬다. [몬스터 코어 획득 x3] 나는 그걸 하나씩 주워 보관함에 넣었다. 손끝이 떨렸다. 무서워서인지, 흥분해서인지 구분이 잘 안 갔다. 아마 둘 다였을 거다. 코어를 집어 드는 손끝에 남은 체액이 미끈거렸다. 옷에 닦아낼까 하다가, 그냥 참았다. 이런 데서 위생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레벨이 3까지 올랐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스테이터스 판을 의식적으로 떠올렸다. [강일] [레벨: 3] [힘: 12 → 15] [체력: 10 → 14] [민첩: 9 → 13] [특수능력: 무한미로, 개인 보관함] 숫자들이 올라가 있었다. 게임을 해본 적은 없지만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이게 성장이라는 거구나. 그리고 이 성장은, 죽음의 위협을 감수한 대가로 얻어진다는 것도. 세 번을 싸웠고, 그중 최소 한 번은 진짜로 아팠다. 등의 통증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벽에 부딫힌 자리가 뻐근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잠깐 앉았다. 숨을 고르며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정리했다. 무한미로는 한번 지나간 길이 재구성된다. 즉 뒤로 돌아갈 수 없고, 앞으로만 나가야 한다. 죽으면 현실로 돌아가지만 통증과 공포는 그대로 겪는다. 몬스터를 잡으면 경험치가 오르고 레벨이 오른다. 그리고 레벨이 오르면 몸이 실제로 더 강해진다. 작동 조건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았다. 위험을 감수해야 경험치가 더 크게 오른다는 느낌. 아까 두 번째 다각충을 벨 때, 도망치는 대신 정면으로 파고들었을 때 얻은 경험치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정확한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싸우면 덜 얻고, 위험하게 싸우면 더 얻는다. 이거 완전 도박이랑 똑같은 구조 아닌가. 리스크가 클수록 리턴이 크다는 건 어디서나 통하는 법칙인가 보다. 나는 잠깐 멈춰서 생각했다. 이 능력, 무한미로. 정체불명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협회도 몰랐고 나도 모른다. 다들 나를 이상한 눈으로 봤다. 처음 능력을 신고했을 때 담당자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뭔가 잘못 입력된 거 아니냐고, 다시 확인해보라고 했다. 근데 확실한 건, 이게 지금 나에게 유일한 돈줄이자 유일한 생존 수단이라는 사실이었다. 통장 잔고가 이십삼만 원 남은 시점에서, 이걸 포기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부러진 부엌칼은 버리고, 보관함에서 아까 챙겨왔던 다른 칼—이번엔 편의점에서 산 등산용 접이식 칼—을 꺼냈다. 이걸 챙겨온 스스로가 조금 어이없었다. 반지하 자취방에서 등산용품을 파는 온라인몰 장바구니에 칼을 담을 때만 해도, 이게 몬스터를 잡는 데 쓰일 줄은 몰랐다. 그때는 그냥 캠핑이나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담아둔 거였다. 세상 일이란 게 참 알 수가 없다. 다시 앞으로 걸었다. 복도가 다시 나타났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구조였다. 좁아지고, 천장도 낮아졌다. 벽에 붙은 돌 색깔도 더 짙어졌다. 마치 미로가 나를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밀어넣는 것 같았다. 걸으면서 팔의 상처를 살폈다. 긁힌 자리가 붉게 부어 있었다. 소독약도 없고 밴드도 없었다. 이런 상태로 계속 걸어야 한다는 게 은근히 무서웠다. 감염이라도 되면 어쩌나. 근데 지금 그런 걸 걱정할 처지도 아니었다. 앞으로 나가야만 다음 통로가 열리고, 통로가 열려야 집으로 돌아갈 길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십 분쯤 걸었을 때, 앞에 방이 하나 나타났다. 방이라고 부르기엔 컸다. 체육관만 한 크기의 공간이었고, 중앙에 뭔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처음엔 그게 바위인 줄 알았다. 가만히 있으니 구분이 안 갔다. 근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표면이 미세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다. 숨을 쉬고 있었다. 판이 정보를 띄웠다. [※ 개체 확인: 갑각다각충(왕종), 위험도: 상] 위험도가 다시 한 단계 올랐다. 크기도 지금까지 봤던 것들과 비교가 안 됐다. 몸통만 트럭 한 대 크기였다. 다리는 셀 수도 없이 많아 보였다. 등딱지는 아까 죽인 놈들과 비슷한 검붉은 색이었는데, 표면에 무슨 무늬 같은 게 새겨져 있었다. 갈라진 균열처럼 보이기도 했고, 오래된 흉터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등산칼을 쥔 채로 그 자리에 서서, 뒷걸음질치려다 멈췄다. 뒤는 이미 벽으로 재구성돼 있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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