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미로가 나를 키운다

2화

협회 서울지부 앞에 도착한 건 아침 아홉 시였다. 유리로 된 십 층짜리 건물이었고, 정문 회전문 위에 걸린 대형 현수막에는 '각성자 등록 상담 무료'라고 적혀 있었다. 무료라는 글자가 다른 글자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폰트 크기까지 계산해서 디자인한 것 같았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오늘 여기 온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건물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멘 사람도 있었다. 다들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각성 확인서 같은 서류였다. 나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어제 밤에 각성했으니 서류를 만들 시간도 없었다. 회전문을 통과할 때 살짝 긴장했다. 어제 그 문 안으로 딱 세 걸음 들어갔다가 그대로 튀어나온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복도 저 끝에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커졌고, 그게 사람 걷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확신한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다행히 문은 등 뒤에 그대로 있었고, 나가는 순간 문도 함께 사라졌다. 사라지는 문을 보면서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저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매트리스에 누워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저건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등록부터 하자. 협회에 등록하면 최소한 뭔지는 알려주겠지. 뭔지도 모르고 계속 들어갔다가는 언젠가 못 나올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씻지도 않고 여기로 왔다. 접수창구는 은행 창구처럼 번호표를 뽑아야 했다. 나는 47번을 뽑았고, 전자 게시판에는 12번이 떠 있었다. 삼십오 명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대기석에 앉아서 삼십오 명분의 시간을 견뎠다. 그 시간 동안 옆자리 남자가 자기 능력이 '중력 반전'이라고 상담원한테 자랑하는 걸 들었고, 앞자리 여자가 '치유'라는 단어를 듣고 눈물을 훔치는 것도 봤다. 나만 조용히 앉아 있었다. 딱히 자랑할 것도, 울 것도 없었다. 47번이 불렸을 때, 접수창구 직원이 내 신분증을 스캐너에 대고, 화면에 뜨는 정보를 확인하며 몇 가지를 물었다. "각성 확인은 언제 하셨어요?" "어제 밤에요." "능력 유형은요?" 나는 잠깐 망설였다가 대답했다. "무한미로라고 뜨는데요." 직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다시 움직였다가, 또 멈췄다. 그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한... 뭐라고 하셨죠?" "무한미로요. 자가 갱신형 인스턴스 던전이라고 뜨던데." 직원은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다시 화면을 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잠시만요" 라는 말만 남기고. 나는 대기 의자에 앉아 벽에 걸린 안내 포스터를 봤다. 각성자 등급표. S급부터 F급까지, 능력의 파괴력과 사회적 유용성을 기준으로 나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화염 조작 능력자는 대개 B급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신체 강화는 C급이 흔하다고 했다. 정신 지배는 A급, 시간 정지는 S급이라고 표에 작게 적혀 있었다. 무한미로라는 항목은 표 어디에도 없었다. 표 아래쪽 여백에 작게 '기타 유형은 개별 심사'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그게 지금 내 상황을 설명하는 유일한 문구였다. 십 분쯤 지나서 나온 건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명찰에 '김도윤'이라고 적혀 있었고, 넥타이가 살짝 삐뚤어져 있었다. 서둘러 나온 사람의 표시였다. "강일 씨, 이쪽으로 오시죠." 상담실은 작았고, 책상 위에는 내가 어제 봤던 것과 비슷한 반투명 판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놓여 있었다. 판정 장치라고 했다. 김도윤 주임은 그 장치를 내 앞으로 밀었다. "이 위에 손을 올려주세요. 능력 정보를 재확인하겠습니다. 이런 유형은 저희 쪽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처음 뜨는 거라, 확인 절차가 좀 길어질 수 있어요." 나는 손을 올렸다. 장치가 잠깐 삐 소리를 냈다. 판에 글자가 떴다. [무한미로 — 자가 갱신형 인스턴스 던전] [등급 산정 불가 — 사유: 유사 사례 없음] [협회 임시 지정 등급: SS급(위험, 검증 필요)] SS급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김도윤 주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놀란 건지 곤란한 건지 구분이 안 되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얼굴, 좋은 신호는 아니다. "이건... 강일 씨 개인 전용 던전을 강일 씨가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말했다. "보통은 이런 유형이 없어요. 대부분 각성자들은 공용 게이트를 통해 외부 던전에 입장하는데, 강일 씨는 스스로 던전을 소환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드문 케이스인지 아세요? 협회 전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각성자가 십만 명이 넘는데, 자가 소환형은 이제까지 세 건밖에 없었어요. 그중 두 건은 해외 사례고요." "그럼 이게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둘 다일 수 있죠." 그는 서류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좋은 점은, 이 던전은 본질적으로 강일 씨 소유라서 다른 각성자와 자원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요. 공용 게이트는 요즘 대기줄이 길어서 입장 순번만 몇 주씩 기다리는 경우도 있는데, 강일 씨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화면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안전 조항. 던전 내에서 사망해도 현실 신체는 무사합니다. 이건 정말 드문 옵션이에요. 대부분의 던전은 실제 사망 위험이 있거든요. 작년에 공용 게이트에서 실종된 각성자만 스물세 명입니다. 강일 씨한테는 최소한 그런 걱정은 없다는 뜻이에요." "나쁜 점은요?" "등급이 SS라는 겁니다." 그가 짧게 대답했다. "검증된 적이 없다는 뜻이고, 그 안에 뭐가 있는지 협회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처음 입장하는 몇 층은 협회 기준으로 '최고 난이도'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전장치가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게 아니에요. 심리적 충격은 실재한다고 나오죠? 그건 진짜입니다. 죽는 순간의 고통, 공포, 그게 다 그대로 느껴집니다. 몸은 안 죽어도 정신은 그걸 다 겪어요." "그러면 몸은 안 다쳐도 정신은 다칠 수 있다는 거네요." "정확합니다." 그가 태블릿에 뭔가를 적으며 말했다. "실제로 재입장을 거부하는 각성자들도 있어요. 몸은 멀쩡했는데 정신적으로 그 던전 자체를 못 견디는 겁니다. 트라우마죠. 강일 씨 경우엔 그게 얼마나 강하게 올지 저희도 예측이 안 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침묵했다. 죽는 순간의 고통을 그대로 느낀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상상해봤다. 상상이 잘 안 됐다. 그게 더 무서웠다. 상상이 안 되는 공포가 상상되는 공포보다 항상 더 크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 건가요." "선택은 강일 씨 몫입니다." 김도윤 주임이 말했다. "다만 안내는 드릴게요. 던전 클리어 보상은 협회가 매입합니다. 몬스터 코어, 아이템, 이런 것들. 등급이 높을수록 보상 단가도 높아요. SS급 던전이면, 만약 1층만 제대로 클리어해도 최저 시급으로 몇 달 벌 돈이 한 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반응이 늦었다. 몇 초가 지나서야 다시 물었다. "얼마나요." "등급별 표준 매입 단가는 이렇습니다." 그가 태블릿을 돌려서 보여줬다. 숫자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F급 코어는 몇만 원, E급은 십만 원대, D급은 수십만 원, 그렇게 올라가다가 SS급 항목에 이르러서는 숫자 앞에 자리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에 눈이 멈췄다. 그 액수는 내가 편의점에서 반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한 번 클리어하면. 딱 한 번. "물론 이건 코어 단독 매입 기준이고요," 김도윤 주임이 덧붙였다. "던전 내에서 얻는 아이템이나 재료는 별도로 시세가 매겨집니다. SS급 던전이면 그 안의 자원도 등급이 높을 가능성이 있어서, 실제 수익은 이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아무것도 못 얻고 나올 수도 있고요." 나는 방세를 생각했다. 반지하 방 곰팡이 냄새를 생각했다. 곰팡이가 벽지 무늬처럼 번져가는 걸 보면서도 도배할 돈이 없어서 그냥 두고 사는 그 방을.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생각했다. 편의점 마감 시간에 폐기 처리되는 도시락을 눈치껏 챙기는 나 자신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문 너머에서 들리던 스륵스륵 소리를 생각했다. 두 가지 공포를 저울에 올려놓고 재보니, 이상하게도 가난 쪽이 더 무거웠다. "등록할게요." 나는 말했다. 김도윤 주임은 잠깐 나를 쳐다봤다. 말리려는 표정이었다가, 결국 서류를 내밀었다. 그 표정 안에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결국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려도 안 들을 사람이라는 걸 눈치챈 건지도 몰랐다. "신중하게 결정하신 거죠?" "네." 나는 대답했다. 사실은 신중한 게 아니라 절박한 거였지만, 그 차이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신중함과 절박함은 겉모습이 비슷해서 서류상으로는 구분이 안 된다.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강일. 볼펜 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 손이 살짝 떨렸는데, 그게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볼펜 자체가 부실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걸로 나는 정식으로 이능관리협회에 등록된 SS급 미분류 각성자가 됐다. 서류에는 '입장 전 반드시 협회 지정 안전요원과 연결된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지만, 무한미로는 협회의 공용 게이트가 아니라 내 개인 소환형 던전이라 그 조항이 실질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저 안에서 나는 온전히 혼자였다. 협회 마크가 찍힌 서류 한 장이 내 등을 받쳐줄 거라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방금 확인한 셈이었다. "강일 씨." 서류를 챙기며 김도윤 주임이 말했다. "진짜 조심하셔야 합니다. SS급은 이름만 붙었지 실제로 아무도 검증한 적이 없어요. 첫 입장 때는 최대한 짧게, 안전 거리 확보 위주로 움직이세요. 위험 요소를 발견하면 무조건 후퇴하시고, 절대 무리하게 전투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거—" 그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긴급 상황 시 연결되는 번호입니다. 물론 던전 안에서는 통신이 안 되겠지만, 나오신 직후에라도 이상 증세가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나는 명함을 받아 지갑에 넣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짧게 움직이라는 조언, 지킬 자신이 없었다. 어제 문 너머로 한 발 들이는 순간 내가 뭘 봤는지 그는 몰랐다. 안전 거리를 확보하라고 하는데, 그 스륵스륵 소리가 얼마나 빠르게 가까워지는지도 그는 모른다. 협회 건물을 나와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 나는 편의점에 들러 라면 두 봉지와 계란 한 판을 샀다. 오늘 밤에 뭘 하게 될지 몰라서, 최소한 마지막 식사는 든든하게 먹어두자는 생각이었다. 계산대 앞에서 알바생이 내 얼굴을 힐끗 보고 별말 없이 바코드를 찍었다. 어제까지 나도 저 자리에 서 있었는데, 이제는 계산대 반대편에 서 있다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방에 들어와서 가스불을 켜고 라면을 끓였다. 냄비 안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반지하 방이라 창문 밖으로 사람들 발이 지나가는 게 보였는데, 그 발들이 다 나보다 훨씬 안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라면을 다 먹고 나서, 빈 냄비를 대충 싱크대에 던져놓고,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그 단어를 떠올렸다. 입장. 방 한가운데 회색 돌문이 다시 나타났다. 어제와 똑같은 문이었다. 표면에 균열처럼 새겨진 무늬도, 손잡이가 없다는 것도 그대로였다. 나는 손잡이도 없는 그 문짝에 손을 올리고, 잠깐 숨을 골랐다. 김도윤 주임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됐다. 죽는 순간의 고통을 그대로 느낀다. 짧게 움직여라. 후퇴가 최우선이다. 다 좋은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말들은 그냥 종이 위의 활자처럼 느껴졌다. 문 너머에서, 스륵스륵 소리가 벌써 들려오고 있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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