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먼지가 가라앉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폐 안쪽까지 들어찬 흙먼지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컥컥거리는 기침이 새어 나왔고, 나는 그 기침 소리마저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이러다 진짜 폐병 걸리는 거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는데, 던전 안에서 폐병으로 죽는 헌터라니, 이건 또 무슨 콘셉트인가 싶어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어둠 속 좁은 통로 하나를 발견하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통로 벽면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청록빛이 유일한 조명이었는데, 그 빛깔이 묘하게 형광펜 잉크 같아서 사무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형광펜을 떠올렸다면 다들 나를 미친놈으로 볼 게 분명했다. 그 빛에 의지해 서연의 팔 상처를 다시 살펴보니 다행히 출혈은 멈춘 상태였다. 상처 주변 피부가 붉게 부어 있었지만, 최소한 지금 당장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길이 막혔으니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해요." 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지만, 그녀는 애써 그것을 숨기려는 듯 턱을 살짝 치켜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통로 안쪽을 살폈는데, 이 좁은 공간 자체가 원래 지도에 없던 미공개 구역이라는 사실이 문득 실감 났다. '헌터 길드도 여기까지는 파악을 못 했나 보군. 하기야 예산 삭감당한 조사팀이 이런 구석까지 훑고 다닐 여유가 있었겠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헌터 길드를 비웃으며 통로 벽면을 손끝으로 쓸었다. 벽은 차갑고 습기가 배어 있었으며, 손가락에 미세한 이끼 같은 것이 묻어났다.
조심스럽게 통로를 따라 걷던 중, 발밑의 바닥이 갑자기 물렁하게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젤리 위를 걷는 것 같은,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그 불길한 탄성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지만, 반응이 반박자 늦었다. 바닥은 이미 균열이 퍼지며 아래로 무너지고 있었고, 나는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시야가 빙글 돌면서 위쪽에서 서연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나는 몇 미터 아래 부드러운 흙바닥에 등을 세게 부딪히며 떨어졌다. 등뼈를 타고 올라오는 충격이 뇌까지 울렸고, 갈비뼈 어딘가에서 둔탁한 통증이 치솟았다. 순간 눈앞이 하얘지면서 '이대로 죽으면 사망 원인이 낙상이라니, 이세계 던전까지 와서 산업재해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숨을 몇 번 몰아쉬고 나니 다행히 뼈가 부러진 느낌은 아니었다. 손가락, 발가락을 하나씩 움직여 보며 골절 여부를 확인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스스로가 이 상황에 지나치게 익숙해졌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오빠! 괜찮아요?" 위쪽에서 서연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절박함이 묻어나는 그 외침에, 나는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소리쳤다. "괜찮네, 낙법이라도 배운 것처럼 잘 떨어졌어." 사실은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녀가 걱정할까 봐 능청스럽게 대꾸한 것이었다. 갈비뼈가 뜨끔거릴 때마다 숨을 짧게 끊어 쉬어야 했지만, 그런 티를 낼 여유는 없었다.
서연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결국 근처에 있던 낡은 밧줄을 발견해 그것을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다친 팔로 밧줄을 붙잡고 체중을 지탱하는 그 동작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에, 나는 아래에서 두 손을 벌린 채 만약을 대비하고 있었다. 밧줄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그녀는 끝내 흔들림 없이 바닥까지 내려왔다. 다친 팔로도 그런 움직임을 해내는 걸 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과 걱정을 동시에 느꼈다. '이 여자, 은근히 독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겉으로는 냉정한 척하지만,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을 텐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그 모습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떨어진 곳은 예상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냉기와 먼지 냄새가 이전 통로와는 확연히 달랐다. 천장이 높고, 사방 벽면에는 조금 전 석실과는 다른 종류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문양들은 붉은빛이 아니라 은은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빛깔이 마치 달빛을 그대로 벽에 새겨 넣은 것 같아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바닥 중앙에는 낡은 석좌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먼지 쌓인 작은 상자 하나가 얹혀 있었다.
"이건... 이 던전의 원래 지도에는 없던 구역이에요." 서연이 주위를 둘러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벽면 문양을 하나씩 훑고 지나가는 걸 보며, 나는 그녀가 지금 머릿속으로 이 공간의 좌표와 구조를 기록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직업병이라는 게 이런 순간에도 발동하는구나 싶었다. "완전히 숨겨진 방이라는 거네요." 그녀가 덧붙였는데, 목소리에는 경계심과 함께 미묘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석좌 쪽으로 다가가며 상자를 살펴보았는데,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아까 의식을 잃었을 때 보았던 그 청록빛 문양과 흡사하다는 걸 알아챘다. 정확히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흐릿했지만, 몸 어딘가에 각인처럼 남은 감각이 그 문양을 알아본 것 같았다. '가슴속에 심어진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뻗어 상자를 만지려 했다.
그 순간, 상자 주변 바닥에 있던 커다란 석재 파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상자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람 몸통만 한 크기의 그 돌덩이는 표면에 이끼와 균열이 뒤덮여 있었고, 딱 봐도 무게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최소 두세 명이 힘을 합쳐야 겨우 옆으로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저 길을 트기 위해 그것을 한 손으로 밀어냈다.
돌덩이는 마치 나무토막처럼 가볍게 옆으로 밀려났다. 손바닥에 닿는 감각은 분명 무거운 석재의 질감이었는데, 실제로 그것을 움직이는 데 든 힘은 종이컵을 밀어내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방금 내가 한 행동이 명백히 비정상적이라는 걸 스스로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거 완전히 게임 밸런스 붕괴 수준인데.' 속으로 그런 농담을 던지며 애써 웃어넘기려 했지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서연 역시 그 모습을 그대로 목격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손끝에서 얼굴로, 다시 돌덩이로 옮겨 가는 그 짧은 몇 초 동안, 나는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어색하게 서 있었다. "오빠... 방금 그거..." 그녀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함께 뚜렷한 의구심이 섞여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털어냈다. "이게, 흙이라 그런지 보기보다 가볍더라고." 하지만 그 돌은 분명 흙이 아니라 단단한 석재였고, 서연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내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 것도, 그녀는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오빠, 아까 그 짐승을 찌를 때도, 지금도... 뭔가 이상해요." 서연이 팔짱을 접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흔들림 없이 정면을 향해 있었고, 마치 심문하듯 나를 훑어보는 그 태도에서 나는 그녀가 이미 뭔가를 짐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나 자신도 그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 뭔가 심어졌다고 말하면 믿어줄까, 아니면 그냥 미친 사람 취급 받을까.' 나는 속으로 그런 갈등을 하며 애매하게 웃어넘겼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튼 이 상자부터 확인해보는 게 좋지 않겠나. 이런 데서 시간 끌다가 또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잖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내 안에서는 이 힘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이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몸 어딘가에서 뭔가가 눈을 뜨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서연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를 더 캐물으려는 듯했지만, 결국 상황의 우선순위를 계산한 듯 시선을 상자 쪽으로 돌렸다. 그녀다운 판단이었다. 지금은 의문보다 생존이 먼저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나란히 석좌 앞에 서서 그 낡은 상자를 내려다보는 순간, 상자 표면의 문양이 갑자기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촛불처럼 미약하게 흔들리던 그 빛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밝아지며 상자 전체를 감쌌다. 나는 그 빛에 눈이 부셔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고, 서연도 손등으로 눈가를 가리며 반걸음 물러섰다.
동시에 방 안쪽 깊은 곳, 우리가 아직 살펴보지 못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무겁게 움직이는 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금속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와 같았는데, 낮고 둔중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질 정도로 육중했다. 삐걱거림도 아니고 마찰음도 아닌, 뭔가 거대한 기계 장치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그 소리에 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서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이 숨겨진 방이 결코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검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고 있었고, 그 눈은 어둠 속 소리의 근원을 향해 날카롭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옆에 섰다. 상자에서 뻗어 나온 빛이 방 전체를 은빛으로 물들이는 동안, 어둠 속 그 무거운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