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청명학원 생존수칙

2화

늦가을 학원의 오후는 유난히 해가 짧아, 창밖으로 스며드는 빛이 이미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런 계절에는 학생들이 교실 밖으로 나오는 것을 꺼려한다는 것이 이 학원의 오래된 통설이었지만, 최근 며칠 사이에는 예외였다. 좁은 복도마저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 소문이었다. 학원 안에는 원래부터 소문이 빠르게 돈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좁은 공간에 갇힌 학생들이 서로의 일상을 유일한 화젯거리로 삼는 탓이었다. 그러나 이도현은 그 소문의 속도가 자신을 향할 줄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복도를 지나가던 학생들이 힐끔거리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선하린과의 짧은 대화가 있었던 다음 날부터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왕녀님께서 신입 교사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다더라, 그것도 이름까지 물어보실 정도로. 그리고 그 소문은 하루가 지날수록 더 정교해지고 있었다. "교사가 왕녀랑 붙어 다닌다며?" 지나가던 학생 하나가 소곤거렸다. "붙어 다닌 게 아니라 그냥 한 번 마주친 거래." 다른 학생이 정정했다. "근데 왕녀님이 먼저 이름 물으신 거 맞지?" "그건 맞는데, 그게 뭐 대수야?" "대수지, 왕가 사람이 아무한테나 이름 묻는 거 봤어?" 그 짧은 대화들이 콩트처럼 이어지다가, 결국 소문은 이미 그런 정정 따위를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누군가는 왕녀가 그를 은밀히 후원한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반대로 그가 왕녀에게 접근하려는 야심가라고 했다. 사실과 무관하게 각자의 상상력이 마음껏 살을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도현은 교무실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는 척하며, 실은 등 뒤에서 들리는 동료 교사들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목소리에는 걱정보다 흥미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 신입,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누군가 웃으며 말했고, 다른 이가 맞받았다. "운이 좋으면 승진이고, 나쁘면 파면이지." 그 말에 웃음소리가 이어졌지만, 이도현에게는 조금도 웃을 여유가 없었다. 명예. 그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명예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목표였는데, 왕녀와 관련된 소문은 명예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 즉 위험 그 자체였다. 왕가의 사람이 특정 교사에게 호의를 보인다는 것은 단순한 화젯거리가 아니라, 정치적 함의를 지닐 수 있는 사건이었고, 최악의 경우 그는 학원장실로 불려가 해명을 요구받거나, 심지어 파면될 수도 있었다. 게임 속 설정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랬다. 선하린이라는 이름의 왕녀는, 원작 시나리오에서 정치적 암투의 중심에 서게 될 인물이었고, 그런 인물과 연결된다는 것은 스토리의 격류에 휘말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날 오후, 이도현은 학원장 한서은에게 호출을 받았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는데, 그것은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자신이 얼마나 얇은 얼음판 위에 서 있는지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학원장실 문을 두드리자 나지막한 응답이 들려왔고,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늘 그렇듯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힌 책상 너머에서 그를 맞았는데, 표정만으로는 이 호출이 문책인지 단순한 확인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책상 위에는 낡은 등불이 놓여 있었고, 그 희미한 불빛이 서류 더미 위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소문 들으셨겠지요." 한서은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으나,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별일이 아니면 좋겠습니다만." 한서은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는데, 그 무심한 어조가 오히려 그에게는 경고처럼 들렸다. "혹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녀가 짧게 답했다. "왕녀님이 어디에 관심을 두시든, 교사가 먼저 다가가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그 말에는 어떤 암시가 담겨 있었는데, 이도현은 그것이 단순한 조언인지, 아니면 미리 그어진 선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짧게 목례를 하고 학원장실을 나섰다. 교무실을 나선 이도현은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은은한 백금발에, 온몸에서 조용한 위엄이 흘러나오는 소녀였는데, 그 얼굴을 알아본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채은. 게임 속 성녀, 대신전에서 자라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온 소녀였다. 복도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빛이 그녀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빛조차 그녀에게는 허락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교사님."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넸는데, 그 목소리는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서,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안녕하세요, 채은 학생." 그가 답했다. 그러자 채은은 잠시 그를 응시했는데, 그 시선 속에는 반가움도, 경계도 아닌,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네 살에 대신전 앞에 버려졌다는 것, 치유의 별의 힘을 각성한 이후 성녀로 지명되며 모든 개인적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것, 이도현은 그 사실을 게임 스토리로 이미 알고 있었다. 성녀에게는 사적인 대화도, 자유로운 외출도, 심지어 스스로 결정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는 설정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지금 학원 복도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오늘도 규칙을 지키셨나요." 이도현이 가볍게 물었다. 별다른 뜻 없이 던진 질문이었으나, 채은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규칙이요." 그녀가 되물었는데, 그 말투에는 미세한 냉소가 섞여 있었다. "저에게는 규칙이 곧 삶이었어요. 벗어난 적이 없거든요." "단 한 번도요?" 그가 물었다. "단 한 번도." 그녀가 반복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부터, 밤에 잠드는 시간까지, 모두 정해져 있었어요. 심지어 웃는 것도 허락된 순간에만 웃어야 했죠." 그 말에 이도현은 대신전에서의 그녀의 삶이 어땠을지, 잠시 상상해보았다. 규칙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으로 산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은 게임 속 텍스트 몇 줄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무게였다. "학원에서는 조금 다를 겁니다." 그가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그 순간 채은의 눈동자에 스친 빛을 그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은 해방에 대한 기대였고, 동시에 위험한 시작이었다. 복도 끝의 가스등이 소리 없이 흔들렸고, 그 불빛 아래 서 있는 소녀의 표정은 이미 조금 전과는 다른 것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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