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골목 끝에 서 있는 로브 차림의 남자는 마도사의 부하인 게 분명해 보였다. 후드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 사이에서 눈동자만 희미하게 빛났는데, 그 빛깔이 사람 같지 않았다. 서준혁이 나를 밀쳐 벽 뒤로 숨기며 낮게 속삭였다.
"움직이지 말고 있어."
"저 사람이 우릴 따라온 거예요?"
"우릴 따라온 게 아니라, 나를 따라온 거야."
그 말투에 확신이 너무 짙게 담겨 있어서 나는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이 남자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놀라지도 않았다. 익숙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서준혁이 골목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벽 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벽돌 사이 틈이 좁아서 시야가 반쪽밖에 안 나왔지만, 그거라도 놓칠 수 없었다.
"저기, 여기서 뭐 하십니까?"
로브 남자가 뭔가 대답했는데 거리가 멀어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 자체가 이상했다. 사람 목소리인데 울림이 두 겹으로 겹쳐서 들리는 느낌이었다. 다만 서준혁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게 보였다. 평소 저 남자의 얼굴이 무슨 표정이든 반쯤 웃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 저 무표정은 꽤 낯설었다.
두 사람이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로브 남자가 돌아서서 사라졌다. 사라지는 방식도 이상했다. 걸어서 멀어진 게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서 윤곽이 흐려지듯 지워졌다. 서준혁이 돌아와 나를 벽 뒤에서 끌어냈다.
"뭐래요?"
"별거 아니래. 순찰 중이었다나."
순찰이라는 말이 너무 편리하게 나왔다. 순찰 중인 자가 사람 형태를 유지하는 데 힘을 다 쓴 것처럼 저렇게 흐려져서 사라지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서준혁도 자기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손끝이 아직도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준혁 씨, 아까 삼 년 전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지금은 뭐예요? 판정 불가에서 벗어난 거예요?"
"벗어난 게 아니라... 그냥 등록만 바꿨어. D급으로."
"어떻게요?"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니까."
대답을 계속 미루는 그의 태도가 신경을 긁었다.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 특유의 여유였다. 나는 그 여유가 나를 이용하기 위한 밑그림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동시에 그 여유가 아니면 지금 이 골목에서 내가 붙잡고 있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
"저 이제 어떻게 해요? 마도사가 다음번엔 안 미룬다고 했잖아요."
서준혁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골목 안쪽 더 깊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발밑에서 깨진 옹기 조각이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인적이 완전히 끊긴 곳까지 가서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도와줄게."
"왜요?"
"판정 불가 출신끼리 도와야지."
그 대답이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패는 많지 않았다. 저 남자를 믿거나, 아니면 혼자 왕실과 맞서거나. 후자를 상상해봤는데 삼 초도 안 돼서 접었다. 왕실이랑 나. 체급 차이가 너무 명확했다.
계산은 빠르게 끝났다. 혼자서는 답이 없었다.
"조건이 있어요."
"조건?"
"준혁 씨가 아는 거, 다 말해줘요. 조금씩 흘리지 말고."
서준혁이 피식 웃었다.
"까다롭네."
"살려면 까다로워야죠."
"좋아. 조금씩은 말고, 필요한 순서대로 말해줄게. 다 한꺼번에 말하면 너 오늘 밤에 못 자."
협상이 성립됐다기보단 서준혁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율된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그거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봤다. 노려본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우선 알아야 할 건, 마도사가 감지한 건 네 마력 반응이 아니라 신체강화의 특이한 파형이야. 판정 불가한테서 그런 파형이 나오는 건 흔치 않아. 그것만으로도 왕실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지."
"저는 그냥 연구 대상이 아니라 사람인데요."
"왕실 입장에서는 그 둘이 별로 다르지 않아."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 오래 쌓인 냉소가 배어 있었다. 이 남자도 한때 같은 처지를 겪었다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오래 저 말을 곱씹었길래 저렇게 무덤덤하게 나오나 싶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해요? 계속 신체강화 쓰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쓸 때마다 감지된다면."
"감지는 파형이 클 때만 걸려. 조절만 잘하면 감지망 아래로 숨을 수 있어. 그걸 가르쳐줄게."
"그게 가능해요? 파형이라는 게 마음대로 줄일 수 있는 거예요?"
"훈련하면 돼. 나도 처음엔 조절 안 됐어. 스스로 감지당하는 줄도 모르고 쓰다가 걸린 적도 있고."
솔직한 대답이었다. 아니, 솔직해 보이는 대답이었다. 이 남자가 하는 말 중에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나는 아직도 구분할 수 없었다.
"거래 조건은요? 공짜로 가르쳐줄 리는 없잖아요."
서준혁이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웃었다.
"의뢰 나갈 때마다 동행. 그리고 보상은 육 대 사, 내가 육."
"방금까지는 육 대 사, 준혁 씨가 사였잖아요."
"이제는 스승 값이 붙었으니까."
"스승이 학생 등쳐먹는 거 아니에요, 그거?"
"등쳐먹기는. 목숨 값이 더 비싼데."
말은 안 됐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거 하나로 흥정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근데 하나만 확실히 해줘요. 준혁 씨, 왕실 쪽 사람 아니죠?"
그가 대답 대신 잠깐 하늘을 봤다. 해가 뉘엇뉘엇 지고 있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또 그 말이었다. 세 번째로 미뤄지는 대답. 나는 그 대답이 나올 때마다 이 남자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깎여나가는 걸 느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신뢰가 없어도 손은 잡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골목을 벗어났다. 서준혁은 창고까지 데려다주는 내내 별 말이 없었고, 나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어색한 게 아니라 각자 머릿속으로 계산할 게 많아서였을 거다, 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날 밤, 창고로 돌아온 나는 잠들기 전까지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되짚었다. 폐광의 상위종 마물, 정보를 은폐한 접수처, 마도사의 지목, 그리고 서준혁의 알 수 없는 과거. 거기에 로브 남자의 이상한 목소리와 흐려지며 사라진 형체까지 더하면, 오늘 하루 만에 처리해야 할 의문이 다섯 개는 됐다.
어느 하나도 마음 편히 넘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천장을 보며 눈을 감았다가 뜨는 걸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잠은 늦게 왔고, 짧았다.
'걱정이 많구나.'
머릿속 이물이 오랜만에 말을 걸었다. 낮 동안엔 조용하던 놈이었다.
'네가 알 바야?'
'알 바지. 네가 죽으면 나도 곤란해지니까.'
'위로가 안 되는데.'
'위로해달란 적 없잖느냐.'
맞는 말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창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드리는 방식부터 어제와 달랐다. 조심스럽지 않고 급했다. 문을 열자 서준혁이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어제와는 확연히 달랐다. 뭔가에 쫄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제 골목에서 로브 남자를 마주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급해 보였다.
"도윤아, 짐 챙겨. 지금 당장."
"왜요, 무슨 일인데요?"
"어제 그 로브 남자, 순찰 아니었어. 오늘 아침에 궁정에서 정식으로 소환장이 나왔대. 너 이름으로."
숨이 턱 막혔다. 소환장이라는 단어가 어제 마도사가 했던 말, 다음번엔 미루지 않는다는 그 말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미룬다는 말을 그 짧은 시간 안에 취소해버릴 줄은 몰랐다.
"지금요? 벌써요?"
"그래, 지금. 기사단이 성문 쪽으로 오고 있대."
"어떻게 알았어요, 그걸?"
"아는 사람이 있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서준혁이 말을 끊고 창밖을 힐끗 봤다. 그 짧은 순간에도 눈빛이 계산을 하고 있었다. 어느 길이 막혔고, 어느 길이 아직 열려있는지 재는 눈이었다.
나는 짐을 챙길 새도 없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 몇 개만 배낭에 쑤셔 넣었다. 어제 벌어놓은 돈이 든 주머니를 놓칠까 봐 손이 떨렸다.
창밖으로 벌써 갑옷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딱딱 부딪치는 그 소리는, 한 명이 아니라 최소 여러 명이 발을 맞춰 걷고 있다는 뜻이었다.
"몇 명이나 와요?"
"몰라. 소리로만 보면 넷, 다섯쯤."
"넷이든 다섯이든 우리 둘로는 못 이겨요."
"이기려고 온 거 아니잖아. 도망칠 거니까."
맞는 말이었지만 위로가 되진 않았다. 나는 배낭을 짊어지고 문 앞에 섰다. 서준혁이 먼저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그의 등 뒤로, 갑옷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