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조용히 살고픈 만능장인

1화

형광등이 파르르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근 사무실, 새벽 세 시. 사무실 안에는 나 말고 후배 한 명뿐이었다. 다들 퇴근한 지 오래였고, 형광등도 절반은 꺼진 상태였다. 키보드 위로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까지 치던 보고서 파일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3분기_실적_최종_진짜최종_v7.hwp'. 진짜 최종이라는 말이 세 번째 붙어 있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모니터 화면이 두 개, 세 개로 늘어났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후배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울렸다. 대답하려는데 목에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가슴 한복판이 뜨겁게 조여왔다. 심장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어딘가가 짜부라지는 느낌이었다. ···아, 이거 진짜 위험한데. 마흔둘 인생에 이런 통증은 처음이었다. 십 년 넘게 마신 자판기 커피와 매일 밤 배달시켜 먹은 짜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죽기 직전에 떠오르는 게 부모님 얼굴이 아니라 짜장면이라니, 나도 참 어지간한 인생을 살았다. 쿵.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 * 눈을 떴을 때 나는 하얀 공간에 서 있었다. 병원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조용했고, 천국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심플했다. 벽도 없고 바닥도 없는데, 이상하게 서 있는 감각은 또렷했다. [서준혁 씨.]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성별도, 나이도 짐작할 수 없는 소리였다. "저 죽은 겁니까." 존댓말이 저절로 나왔다. 상대가 누군지 모를 땐 일단 존댓말이 국룰이니까. 회사 생활 십오 년이 몸에 새긴 습관은 죽어서도 안 사라지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과로사입니다.] [사인란에 기재된 사유는 '심장 및 뇌혈관계 복합 파열, 만성 스트레스, 3년째 야근 지속'입니다.] ···3년째 야근 지속이라니, 그걸 사인으로 남길 정도면 진짜 유서 써놓고 죽었어야 했다. 아니, 유서 쓸 시간도 없었다. 야근이 유서 쓸 시간을 안 줬으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규정상 억울하게 사망한 영혼에게는 새로운 삶의 기회가 부여됩니다.] [서준혁 씨는 이세계로 이동하며, 정착에 필요한 스킬 하나를 지급받습니다.] 뭐야, 이거 완전 게임 시작 화면 같잖아. 속으로는 이미 실소가 터졌다. "그럼 캐릭터 커스터마이징도 있습니까? 얼굴 좀 바꿔주면 좋겠는데." [불가능합니다. 서준혁 씨의 외형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칼같은 대답이었다. 서비스 정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목소리였다. "스킬이요? 어떤 건데요." [【만능생성】 스킬입니다.] [사용자가 완전히 숙지한 사물이라면, 재료 없이도 그 형태와 성질을 그대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단, 정신력을 소모하며, 사용자가 대상을 정확히 알지 못할 경우 결과물의 완성도가 낮아집니다.] 뭔가 거창한 이름인데 조건이 은근히 까다로웠다. "완전히 숙지한 사물이라니, 그게 뭔 뜻입니까." [예를 들어, 서준혁 씨가 평생 마셔온 커피의 성분과 향, 온도, 질감을 세세히 알고 있다면 완벽한 커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동차 엔진을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다면, 조악하고 불완전한 형태로만 생성됩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럼 나는 커피랑 담배는 도가 텄으니 그것만 만들면서 살 수 있다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정리하면, 첫째, 제가 완전히 아는 물건만 만들 수 있고. 둘째, 만들 때마다 정신력이 깎이고. 셋째, 대충 아는 건 대충 나온다는 거네요." [정확합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마치 이게 얼마나 부실한 스킬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거 완전 사기 캐릭터 아니고 그냥 잡캐 아닙니까?" [개인의 역량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말은 청산유수네. "저 그럼 이제 뭐 하면 됩니까." [살아가시면 됩니다.] 대답이 너무 심플해서 오히려 짜증이 났다. "그게 답니까? 몬스터는 없어요? 마왕은요? 던전 같은 것도 있고 그런 거 아닙니까?" [있습니다.] [하지만 서준혁 씨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조용히 사시면 됩니다.] 조용히 살라는 말이, 그 순간 내 인생 최대의 로또처럼 들렸다. 야근도 없고, 부장님 눈치도 없고, 상사 카톡 알림도 없는 삶. "진짜입니까? 진짜로 그냥 조용히 살아도 됩니까? 나중에 갑자기 세계 멸망 막으라고 그러는 거 아니고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목소리에서 아주 미묘하게 확신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냥 내 착각이겠지. 죽고 나니 의심병까지 생긴 모양이다. "좋습니다. 조용히 살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새하얗게 번쩍였다. * * * 습기 가득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흙, 풀, 그리고 어딘가 젖은 나무 냄새. 눈을 뜨니 울창한 숲속이었다. 바람이 잎사귀를 스치는 소리, 저 멀리서 새 우는 소리, 발밑은 축축한 흙이었다. "아니 이거 뭐야."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옷은 그대로였다. 죄 없는 셔츠와 슬랙스가 이세계까지 따라온 게 웃겼다. 넥타이는 여전히 목에 걸려 있었고, 사원증도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회사에서 죽은 사람은 이세계에서도 회사원처럼 서 있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사원증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었잖아." 크르르릉. 낮고 굵은 울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사람만 한 크기의 회색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동자는 붉었고, 침이 턱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망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무기? 아무것도 없다. 도망? 다리가 이미 얼어붙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쳤다. 회사 다니면서 배운 게 있다면, 도망칠 곳이 없을 때는 일단 뭐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만능생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뜬 글자가 이 상황에서 얼마나 웃긴지, 그땐 몰랐다. "뭐, 뭘 만들어야 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완전히 숙지한 사물이 뭐가 있더라. 회사 다니면서 십 년 넘게 매일 뽑아 마신 자판기 커피, 아니, 그건 지금 무기가 안 되잖아. 정수기? 그것도 안 된다. 마우스? 그건 더 안 된다. 소화기. 갑자기 회사 안전교육 자료에서 본 소화기 그림이 떠올랐다. 십 년 넘게 매년 소방훈련 때마다 몸으로 배운 물건이었다. 손잡이 위치, 안전핀 뽑는 방향, 분사 거리, 심지어 그 빨간 도색의 광택까지 눈에 선했다. "소화기!" 외치는 순간 손안에서 빨간 실린더가 뭉클, 형태를 갖췄다. 무게감이 느껴졌다. 진짜였다. 표면의 서늘한 금속 촉감, 손잡이의 각진 모서리까지 전부 진짜였다. 늑대가 달려들었다. 칙! 손잡이를 당기자 흰 분말이 얼굴을 정면으로 뒤덮었다. 캬앙! 놈이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 틈에 나는 소화기 몸통으로 놈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늑대가 옆으로 튕겨 나갔다. ···됐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손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른 것 같았다.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렸지만, 신기하게도 소화기를 쥔 손만은 힘이 들어갔다. [【만능생성】 사용으로 정신력 32 소모.] [남은 정신력 68.] 정신력이라는 게 있었나. 그것도 숫자로 표시되는구나. ···이거 완전 게임 스탯창이잖아. 그럼 이거 다 쓰면 어떻게 되는 거지. 기절하나? 죽나? 아무도 설명을 안 해줬잖아. 늑대는 신음하며 숲속으로 도망쳤다. 나는 소화기를 끌어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배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아니, 이미 한 번 죽었으니까 두 번째로 죽다 살아난 셈인가. 이러다 세 번째, 네 번째도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갑자기 서러워졌다. "아, 커피 한 잔만 있었으면." 방금 늑대를 때려잡고서 나온 말이 그거였다. ···나도 참 어지간하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도 카페인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나는 정말 회사원으로 죽을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소화기를 옆에 내려놓고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이게 진짜 현실이구나, 하는 감각이 그제야 온몸으로 퍼졌다. 숲 저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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