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황녀의 마지막 구원자

2화

"공작이 왜……" 은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상궁이 숨을 몰아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치맛자락이 다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황녀님께서 소환 의식을 치른다는 소식이 새어 나간 것 같습니다." 은서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핏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이게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방금까지 있었던 소환 의식, 낯선 궁, 그리고 지금의 이 소란까지. 전부 하나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그 실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물을 겨를도 없어 보였다. 은서의 눈동자가 방문 쪽을 향해 있었다.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은서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방금 전까지 나를 안심시키던 손이었는데, 지금은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녀는 나를 옆방으로 데려가더니 두꺼운 커튼 뒤에 세웠다. 커튼은 짙은 남색이었고, 자수로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부탁이에요. 잠시만 숨어 계세요." 그녀의 눈빛이 간절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최대한 낮추고, 커튼 자락을 조심스럽게 몸 앞으로 끌어당겼다.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짝이 벽에 부딪히는 듯 거칠었다.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목소리만으로도 체격이 짐작될 만큼 낮고 무거운 소리였다. "황녀님, 야심한 시각에 마법 의식을 치르셨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공작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은서의 목소리는 방금 전과 달랐다. 차갑고, 날이 서 있었다. 방금까지 내 손을 잡고 떨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목소리였다. '저게 진짜 얼굴인가.' 나는 커튼 틈으로 눈을 옮겼다. "황실의 정통성과 관련된 일이라면, 저에게도 관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남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비웃음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황녀님께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커튼 틈새로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폈다. 덩치 큰 중년 남자가 은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실로 장식된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짐승처럼 탐욕스러웠다. 살집이 두툼한 손가락에 반지를 여러 개 끼고 있었고, 그 손이 탁자를 짚을 때마다 반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제 아들을 배필로 받아들이신다면, 서흔국의 위협도, 대귀족들의 견제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거절합니다." 은서가 단칼에 잘랐다. 남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턱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황녀님. 두 달 후면 성년식입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걸음씩 다가서며 말하는 통에, 목소리가 방 전체를 누르는 것처럼 들렸다. "그때까지 배필을 정하지 못하시면, 원로원이 강제로 정할 겁니다. 저희 가문이든, 서흔국 왕자든." 그 말과 동시에, 방 안의 물그릇이 쨍 하는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나는 흠칫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은서의 손끝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손가락 사이를 스며 나왔다가, 다시 스러졌다. '저거, 마법인가.' 감정이 격해지면 힘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공작은 그걸 보고도 여유롭게 웃었다.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제어가 안 되시는군요. 여전히." 그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방 안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은서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치맛자락이 바닥에 흐트러졌다. 나는 커튼을 젖히고 나가 그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이런 걸 보여드리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손끝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성년식 이후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거예요?" 은서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손끝을 따라 푸른 선이 그어졌다. 그 선이 점점 넓어지며, 흩어지듯 작은 영상이 만들어졌다. 마법으로 저장된 기억이라고 했다. 영상 속에는 불타는 궁전이 있었다. 시뻘건 화염이 지붕을 타고 오르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칼을 든 병사들과, 쓰러진 사람들. 바닥에는 붉은 흔적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붉은 곤룡포를 입은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이 보였다. 그의 손이 허공을 향해 뻗어 있었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저희 아버지예요." 은서의 목소리가 무너지듯 흔들렸다. "삼 년 전, 대귀족들의 반란으로 돌아가셨어요." 영상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어린 은서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작은 발이 흙바닥을 밟으며 뛰고 있었고, 어머니의 옷자락은 반쯤 찢겨 있었다. 주변에서는 병사들의 함성과 불타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하지만 곧 화면이 뚝 끊겼다. 영상 전체가 흔들리며 지지직 소음을 냈다. 방 안의 촛불이 일제히 꺼졌다. 순간적으로 어둠이 방을 덮었다. "제가…… 제어를 못 해요." 은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흐릿한 빛이 새어 나왔다가 사라졌다. 그녀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마법이 폭주하는 것 같았다. 방 전체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창문이 삐걱거리고, 촛대가 저절로 넘어졌다. 바닥에 놓인 찻잔이 스스로 미끄러지며 탁자 끝으로 밀려났다.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이 소녀가 짊어진 게 얼마나 무거운 건지 실감했다. '혼자서 이걸 다 견디고 있었던 건가.' 말로만 듣던 황녀라는 자리가,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어머니는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서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모르겠어요." 그 짧은 대답이, 방 안의 모든 소음을 덮어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떨리는 손을 무릎 위에 겹쳐 놓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옆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침묵을 지켰다. 방 안의 어둠 속에서, 꺼진 촛불의 심지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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