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그림자, 내가 찜했어

4화

다음 날부터, 서은채는 정말로 나를 찾아왔다. 학원이 끝나면 어김없이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틀, 사흘, 나흘. 같은 자리, 같은 시간, 같은 자세로 벽에 기대선 그 애를 보면서, 나는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자." 짧게 그 한마디를 던지고 앞장서서 걷는 게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 됐다.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오면, 복도 끝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서은채가 보였다. 다른 학생들이 지나가며 힐끔거려도 그 애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발견하면 손을 슬쩍 들어 보이는 정도였다. 나는 처음 며칠 동안 계속 거절을 시도했다. "저 오늘 좀 바빠서." "뭐가 바쁜데." "···그냥, 여러 가지로."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지, 얼굴에 다 티 나." 그 말이 맞았는지, 나는 매번 거절에 실패했다. 한번은 정말로 급한 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서은채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급한 일이 뭔데. 말해봐." "···숙제요." "숙제 안 가져온 거 다 알아. 가방 얇잖아." 가방을 슬쩍 내려다봤다. 정말로 얇았다.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매일, 학원이 끝나면 그 애를 따라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서, 그 애는 매번 다른 걸 요구했다. "이거 넣어봐." 연습장, 텀블러, 우산. 손에 잡히는 것마다 그림자에 넣어보라고 시켰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촤아ㅡ 그림자가 물결처럼 일렁이고, 물건이 사라졌다. 다시 꺼내면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서은채는 그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마치 신기한 마술을 보는 아이처럼. "이번엔 이거."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 내밀었다. 나는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촤아ㅡ 볼펜이 사라졌다. "다시 꺼내봐." 손을 다시 뻗어 볼펜을 꺼냈다. 그 애가 볼펜을 받아 이리저리 돌려보며 확인했다. 잉크도, 클립도, 흠집 하나까지 그대로였다. "똑같네." "네." "근데 왜 매번 신기해해요." "신기하니까." 그 대답에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텀블러 안에 들어 있던 커피가 문제였다. 그날은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서은채가 편의점에서 뜨거운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사 왔다. 그러곤 대뜬 나에게 내밀었다. "이거 넣어봐." "이거요? 커피 다 식으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넣어보라는 거야." 나는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만, 시키는 대로 그림자에 텀블러를 넣었다. 촤아ㅡ "이거 넣고 삼십 분 지나면 다 식을 텐데." 서은채가 손목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곤 벤치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나를 흘긋거렸다. "뭐 하면서 기다려요?" "그냥 있어." 정말로 그냥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삼십 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공원을 지나가는 사람들, 벤치 옆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 저 멀리서 들리는 아이들 웃음소리. 서은채는 그 모든 걸 구경하듯 눈으로 좇았고, 나는 그 옆에서 손목시계 초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삼십 분 뒤, 나는 텀블러를 다시 꺼냈다. 뚜껑을 열자 뜨거운 김이 확 올라왔다. "···이거." 그 애가 눈을 크게 떴다. "안에서는 시간이 안 가는 거야?" 나도 정확히는 몰랐다. 다만 오래전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다. 음식을 넣어놓으면 상하지 않았고, 얼음을 넣어놓으면 녹지 않았다. 어릴 때 냉면을 그림자에 숨겼다가 며칠 뒤에 꺼내 먹은 적도 있었다. 그때는 그냥 신기한 정도로만 생각했지, 이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깊게 따져보지 않았다. "···그런 것 같아요." "신기하네." 그 애가 텀블러를 손에 쥐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손끝으로 텀블러 표면을 쓸어보기도 하고,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도 했다. 표정이 묘했다. 놀람과 흥미, 그리고 그 뒤로 언뜻 스치는 다른 무언가. 나는 그 표정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낼 수 없었다. 다만 뭔가 계산하는 듯한 눈빛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거 가지고 뭐 할 수 있는데." "모르겠어요, 그냥 넣고 꺼내는 거밖에는." "거짓말." "진짜예요." "세상에 이런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해봤다는 게 말이 돼?" "···해볼 생각을 안 해봤어요." 서은채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넌 진짜 특이해."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그럼 왜 아무한테도 안 말했어." 나는 대답을 미뤘다. 말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게 뻔했다. 아니면 이용하려 들거나. 세상에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지만, 내 것처럼 애매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능력은 흔치 않았다. 공격도 못 하고, 방어도 못 하고, 그냥 물건이나 넣고 빼는 것. 누구한테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숨기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 애 말고, 딱 한 명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 그날 학교에서 하필 준서가 그 얘기를 꺼냈다. 쉬는 시간, 창밖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준서가 갑자기 창문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자리로 다가왔다. "야, 도훈아. 나 우산 두고 왔는데, 너 그거 있잖아."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 4차원 포켓." "쉿." "아무도 안 들어, 걱정 마." 준서는 정말로 태평했다. 내 능력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딱 그 수준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금 편리한 주머니 정도. 처음 준서에게 능력을 보여줬을 때도 그랬다. "오, 신기하다" 하고는 그날 저녁 먹을 라면을 넣어달라고 부탁한 게 다였다. 그 이후로 준서는 내 능력을 딱히 대단하게 여기지도, 무섭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냥 나라는 사람이 가진 특징 중 하나 정도로. 그게 오히려 편했다. "진짜 없어? 나 오늘 비 맞으면 엄마한테 죽어." "···잠깐만요." 나는 주변을 한 번 더 살피고, 슬쩍 그림자를 열어 우산을 꺼내줬다. 촤악ㅡ "오 역시, 고맙다 진짜." 준서가 아무렇지 않게 우산을 받아 들고 갔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복도 끝에서 서은채가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애의 시선을 늦게 알아챘다. 분명 조심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그 애가 나를 붙잡았다. 교실 밖 계단, 다른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뒤였다. 서은채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애, 너 능력 알아?" "···조금은요." "조금이 뭔데." "그냥, 물건 넣고 뺄 수 있다는 정도만." "시간 안 가는 것도 몰라?" "그건 몰라요." 서은채가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조금 전 텀블러를 들여다볼 때와 비슷했다. 뭔가를 재고 따지는 듯한. "걔가 몰라서 다행이네." "···왜요?" "몰라도 되니까." 그 말투가 이상하게 날이 서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서 있었다. 계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 애의 머리카락을 흔들었고, 나는 괜히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발끝을 내려다봤다. "근데 왜 그렇게 물어봐요,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 "그런 것 같지 않은데." "뭐가." "그냥, 표정이." 서은채가 잠깐 멈칫하더니 팔짱을 더 세게 꼈다. "내 표정이 뭐." "···아니에요." 더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치 준서가 나에 대해 더 알게 되는 걸, 그 애가 원치 않는 것처럼. 나는 그 감정의 이름을 알 것 같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어차피 알아봤자 좋을 게 없는 감정이었으니까. 계단을 내려가는 그 애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비는 여전히 창밖에서 내리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방금 그 애가 남긴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몰라도 되니까.' 그 말이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건지,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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