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알람이 울렸다.
일곱 시 반, 평소와 같은 시각이었다.
나는 눈을 뜨고도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천장 벽지의 얼룩을 세는 게 요즘 아침의 유일한 습관이었다.
서른일곱 개.
오늘도 서른일곱 개였다.
어제도 서른일곱, 그저께도 서른일곱.
벽지는 바뀌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 아침 그걸 다시 셌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뭐라도 세고 있으면 시간이 흘러갔으니까.
숫자를 세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아서 좋았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말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지금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름이니까.
작년, 고등학교 1학년 겨울에 그 애는 나를 떠났다.
그것도 내가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케이크를 사러 가는 길에 전화가 왔었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웃었다.
왜 웃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게 그렇게 웃겼다.
케이크 상자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던 것 같은데, 그것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나는 뭘 기대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기대라는 게 애초에 배신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감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뭔가를 바라기 전에 먼저 접는 버릇이 생겼다.
바라지 않으면, 적어도 실망할 일은 없으니까.
"이도훈, 밥 안 먹어?"
엄마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올라왔다.
나는 대충 "먹어요" 하고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목이 뻐근했다.
어제도 늦게까지 휴대폰을 보다 잔 탓이었다.
옷장을 열었다.
교복 셔츠가 구겨져 있었다.
다림질은 안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내 셔츠를 눈여겨보지 않을 테니까.
셔츠를 걸치고 단추를 하나씩 채우는 동안,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눈 밑에 그늘이 짙었다.
그리고 옷장 아래, 방 한쪽 구석.
내 그림자가 거기 얌전히 붙어 있었다.
형광등을 켜도 사라지지 않는, 조금 이상한 그림자였다.
나는 손끝을 그림자 표면에 살짝 갖다 댔다.
그러자 그림자가 물처럼 일렁였다.
촤아ㅡ
표면이 잔물결처럼 흔들리더니, 안에서 뭔가가 쑥 올라왔다.
어제 저녁에 넣어둔 이어폰이었다.
줄이 하나도 엉키지 않은 채 깔끔하게 나왔다.
가방 속에 넣어뒀으면 분명 매듭이 생겼을 텐데, 그림자 속에서는 늘 나올 때 그대로였다.
나는 이 능력을 '영수납'이라고 혼자 이름 붙였다.
그림자 속에 물건을 집어넣고, 다시 꺼낼 수 있는 능력.
중학교 2학년 무렵, 아무도 없는 집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처음에는 무서웠고, 그다음에는 신기했고, 지금은 그냥 생활의 일부였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손끝이 그림자 속으로 쑥 들어가는 걸 보고 소리도 못 지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었다.
혹시 팔이 잘리는 건 아닐까, 진심으로 그런 걱정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습지만, 그때는 정말 심각했다.
딱히 대단한 건 없었다.
지갑을 잃어버릴 걱정이 없다는 것, 우산을 안 챙겨도 된다는 것.
그 정도의 편리함이었다.
가끔은 급식 시간에 몰래 초콜릿을 숨겨두는 용도로도 썼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계단을 내려갔다.
식탁 위에는 계란말이와 김치, 흰밥이 놓여 있었다.
엄마는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채였다.
"오늘도 늦게 와?"
"학원 있어서요."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엄마는 그 말만 남기고 현관을 나섰다.
나는 계란말이를 몇 조각 집어먹고 가방을 멨다.
***
한빛고등학교 2학년 3반.
교실 뒷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어이, 이도훈!"
박준서였다.
180센티미터의 큰 키로 손을 번쩍 들어 흔드는 그 모습이 오늘도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반 애들 몇 명이 그쪽을 힐끔거렸다.
"목소리 좀 낮춰."
"왜, 아침부터 기분 안 좋아?"
"매일 기분 안 좋아."
"쯔쯔, 그러다 늙는다니까."
준서는 축구부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 같은 애랑 붙어 다녔다.
밝은 애들은 원래 어두운 애들한테 이상한 사명감을 느끼는 걸까.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
자리에 앉자 준서가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왔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긁히며 끄윽 소리를 냈다.
"오늘 나리랑 점심 같이 먹기로 했는데, 너도 올래?"
"됐어."
"에이, 왜 매번 그래."
"셋이 있으면 내가 어색해."
"어색할 게 뭐가 있어, 나리도 너 좋아하는데."
한나리.
박준서의 여자친구.
그 둘을 볼 때마다 나는 조금 눈이 부셨다.
순수한 행복이라는 게 저렇게 눈을 태울 정도로 밝을 수 있다는 걸, 그 둘을 보면서 처음 알았다.
부럽다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냥,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 같았다.
"생각해볼게."
"매번 그렇게 말하고 안 오잖아."
"이번엔 진짜 생각해본다니까."
준서가 피식 웃더니 어깨를 툭 쳤다.
그 손길에 딱히 뭔가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조금, 따뜻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준서는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창밖을 잠깐 바라봤다.
운동장에 축구부 애들이 공을 차는 모습이 보였다.
저 애들 중 누구도 자기 그림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
수업이 끝나고 나는 학원으로 향했다.
한빛단과학원.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있는 평범한 학원이었다.
건물 앞에는 늘 그렇듯 학생들이 몇 명씩 무리 지어 담배 냄새를 풍기며 서 있었다.
나는 그 사이를 지나쳐 로비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에어컨 바람 때문인가 싶어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그 기운은 점점 짙어졌다.
고개를 들었다.
검은 긴 머리, 앳된 얼굴, 그리고 진홍색 눈동자.
서은채였다.
같은 학원 1학년, 학교 안팎으로 '얼음공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애.
누구에게도 웃어주지 않는다는 소문이 유명했다.
나는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그 별명만큼은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누가 인사를 걸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남자애들이 대놓고 말을 걸다가 무안당했다는 이야기도.
그 애는 나를 힐끗 보더니, 곧바로 시선을 거뒀다.
딱 그뿐이었다.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띵-
문이 열리고, 그 애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좁은 로비 안에서 그 소리만 유독 선명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은 좁았고, 은채와 나 사이의 거리는 한 걸음 정도였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며 그 정적을 견뎠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그 애가 다시 나를 돌아봤다.
이번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마치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진홍색 눈동자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유난히 짙게 빛났다.
나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쿠웅-
내 그림자 쪽을, 그 애가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발밑에 늘어진 그림자의 끝자락.
형광등 불빛 아래서도 유난히 검고 짙은, 그 부분을.
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냥 우연이겠지, 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은채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움직였다.
웃은 건가.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건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그 애는 다시 정면을 보고 서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알았다.
방금 그 눈빛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