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일단 30일만 부부입니다

2화

정우진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손끝이 얼어붙는 감각을 느꼈다. 분명 열쇠는 자신의 바지 주머니와 책상 위 서랍에만 있어야 했는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저 물건이 자신의 열쇠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서인 반듯한 어깨선 위로 떨어지는 짙은 색 코트,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머리카락, 그리고 그 아래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매까지, 마치 처음부터 이 좁은 복도 따위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서인이 열쇠를 손끝에서 가볍게 돌리고 있었다. "그거... 어떻게 그걸 갖고 있어요?" 정우진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관리실에." 서인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보조 열쇠 하나 맡겨져 있더라고. 사정 얘기하니까 순순히 내주셨어." "사정이요? 무슨 사정을..." 정우진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여자친구인데 서프라이즈 방문이라고." 서인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믿어주셨어, 아저씨가." 정우진은 순간 아연해졌다. 관리인 아저씨의 순박한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복도에서 마주치면 "학생, 밥 잘 챙겨 먹어" 하며 웃어주던 그 얼굴이, 지금 이 능숙한 언변에 홀딱 넘어갔을 모습으로 겹쳐졌고, 동시에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뒤늦게 실감했다. 여자친구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온 것도 이상했지만, 그보다 서인이 이런 거짓말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능숙하게 해냈다는 사실이 더 서늘하게 다가왔다. "이건... 명백히 사생활 침해예요." 정우진이 애써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요." "그래." 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도 돼." 예상외의 대답에 정우진이 잠시 말을 잃었다. 신고를 해도 된다는 말이 어떤 자신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어서 정우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신, 신고하기 전에 이건 좀 들어봐." 서인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손바닥만 한 검은색 기기였다. 정우진의 시선이 그 기기에 고정되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서늘한 감각이 목덜미까지 타고 올라왔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서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서인의 손끝이 버튼 하나를 눌렀고, 이내 스피커에서 익숙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진아, 오늘 하루는 어땠어?"] ["그냥... 평범했어요. 조별 과제에서 또 저만 발표를 맡게 됐는데..."] ["또? 그 팀장이라는 애 말이야, 이번엔 뭐라고 했는데."] ["그냥... 제가 목소리가 크대요. 발표 잘한다고."] ["웃기네. 그거 핑계지."] 정우진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분명 지난주 화요일, 헤드셋을 쓰고 나눈 대화였는데, 그 목소리가 지금 이 작은 기기에서 그대로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날 밤 별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나눈 사소한 이야기들이, 지금 이렇게 증거처럼 재생되고 있다는 것이 소름 끼치도록 낯설었다. "이걸... 녹음했어요?" 정우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응." 서인이 아무렇지 않게 기기를 정지시켰다. "몇 달 전부터, 전부." "왜, 왜 그런 걸..." "나중에 필요할 것 같아서." 서인이 짧게 대답했다. "지금처럼." 정우진의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지금까지 그가 알아온 서인은 어른스럽고 여유로운 사람이었는데,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향해 밀어붙이는 낯선 존재였고, 그 낙차가 너무 커서 정우진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손을 뻗어 벽을 짚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서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참았다. "이걸로 뭘 하려는 건데요." 정우진이 겨우 물었다. "별거 아니야." 서인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잘 아는지 증거로 남겨두는 거지." *** 정우진은 결국 서인을 원룸 안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좁은 복도에서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도 무리였고, 관리실 아저씨까지 거짓말로 넘어갈 정도로 능숙한 이 사람을 계단 밖에 두고 문을 닫는다고 해서 상황이 끝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옆집 문이 살짝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정우진은 더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책상 하나, 침대 하나, 작은 옷장 하나가 겨우 들어차 있는 방 안에서, 서인은 익숙한 듯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고, 정우진은 그 맞은편에 어색하게 선 채로 팔짱을 꼈다. 책상 위에 쌓인 전공 서적들과 벽에 붙은 시간표가 서인의 눈에 스치듯 훑고 지나가는 것을 정우진은 놓치지 않았고, 그 시선이 마치 자신의 삶 전체를 훑어보는 것 같아서 괜히 팔에 힘이 들어갔다. "결혼은 진짜 무리예요." 정우진이 다시 한번 못을 박듯 말했다. "저는 아직 학생이고, 서인 씨는... 저보다 나이도 많고, 하는 일도 다르고요." "결혼이 부담스러우면." 서인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진짜 결혼 말고, 다른 방법도 있어." 정우진의 눈이 커졌다. "무슨 방법이요." "한 달만." 서인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딱 한 달만, 나랑 같이 살아줘." "네?" "부부처럼." 서인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진짜 결혼은 아니고, 그냥... 같이 지내보는 거야. 12월 말까지." 정우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결혼이라는 말도 충격적이었는데, 이제는 한 달간 동거를 하자는 제안까지 나온 상황이었고, 그는 이 모든 것이 정말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다시 한번 자신의 뺨을 만져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그 소리가 이 비현실적인 대화에 조금이라도 현실감을 붙여주기를 바랐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 달이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정우진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것도 이상하잖아요. 남녀가 갑자기 부부처럼 산다는 게..." "이상할 게 뭐가 있어." 서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우리 관계가 이상한 건 이미 정해진 거잖아. 지금 와서 그게 새삼스러운 문제는 아닐 텐데." 정우진은 그 말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서인에게 느끼는 감정도, 서인이 자신에게 보이는 이 이상한 집착도, 둘 다 이미 평범한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왜 그런 걸 하려는 거예요." 정우진이 겨우 물었다. 서인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흔들렸다. 지금까지 단호하고 흔들림 없던 그 얼굴에, 처음으로 작은 균열이 스치는 것을 정우진은 놓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순간의 표정 변화가 그에게는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잘 벼려진 유리 표면에 아주 미세한 실금이 생긴 것처럼, 그 균열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정우진의 눈에는 분명하게 남았다. "그건." 서인이 시선을 잠깐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었다.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 말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밀어붙였다. "싫으면." 서인이 다시 그 검은색 기기를 손끝으로 만지며 말을 이었다. "내가 관리실에서 뭐라고 했는지,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나눈 얘기가 얼마나 많이 녹음되어 있는지, 그런 걸 좀 더 자세히 들어봐야 할까?" 정우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협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태연한 말투였고, 그 태연함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으며, 그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정우진은 이상하게도 이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만이라고 했죠." 정우진이 결국 낮게 되물었다. 서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가 승리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정우진은 도무지 읽어낼 수 없었다. "그래." 서인이 낮게 대답했다. "한 달만. 그 이후에는, 우리 둘 다 다시 생각해보면 되니까." 정우진은 그 말에 담긴 미묘한 여운을 눈치채지 못한 채, 자신이 방금 무엇에 동의했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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