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길드장의 오년공백

1화

새벽 세 시, 흑익 길드 마스터 집무실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웠다. 왕도의 불빛들도 하나둘 꺼져가는 시각이었다. 이도훈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예산 승인서, 신입 심사표, 분기별 던전 등급 재조정안. 종류만 세 가지였고, 양은 각각 한 뭉치씩이었다. 서류 뭉치 옆에는 다 식은 차가 놓여 있었다. 몇 시간째 손도 대지 않은 것이었다. '이걸 다 처리하면 아침이 오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펜을 다시 쥐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언제부터 이런 감각이 익숙해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흑익 길드는 왕도 최고의 모험자 길드였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이도훈이 흘린 것은 피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길드마스터가 된 지 삼 년, 그동안 그는 단 하루도 완전히 쉬어본 적이 없었다. 초창기에는 몸으로 뛰었다. 밤낮없이 던전을 드나들었고, 몸에 상처가 늘어갈수록 길드의 이름도 커져갔다. 지금은 서류로 뛰고 있었다. 서명 하나에 사람 열 명의 생계가 걸려 있었고, 결재 하나에 던전 하나의 등급이 오르내렸다. 몸은 편했다. 대신 다른 무언가가 조금씩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마스터님, 아직도 안 자셨어요?" 접수원 송이슬이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뜨거운 차가 들려 있었다. "이슬 씨도 늦었네요." 이도훈이 고개를 들며 짧게 웃었다. "저야 마감 때문이죠. 마스터님은 이제 좀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송이슬의 목소리엔 걱정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새로 끓인 차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식은 잔을 슬쩍 치웠다. "이거 벌써 세 번째 잔이에요. 다 식었잖아요." 그녀가 잔소리처럼 덧붙였다. "곧 끝나요." 그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 삼 년째 같은 말이었다. 송이슬은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문이 닫히기 전, 그녀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부길드마스터 장하영이 뒤이어 들어왔다. 손에는 또 다른 보고서 뭉치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삼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신입 육성 예산안입니다. 오늘 안에 서명이 필요해요." 장하영의 어조엔 사정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도훈은 순순히 받아들었다. 장하영은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마스터님, 낯빛이 안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는 짧게 답했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눈 밑에 그늘이 깊었고, 손끝은 여전히 저릿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입 밖에 낼 이유는 없었다. 장하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서류를 내려놓고 조용히 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에도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 다음 날 아침, 훈련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강서윤이 이도훈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왕도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그녀였지만, 이도훈 앞에서는 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훈련장 바닥에는 그녀가 흘린 땀 자국이 선명했다. 오늘도 새벽부터 검을 잡았던 모양이었다. "오늘도 서류만 붙잡고 있을 거예요?" 강서윤이 물었다. "할 일이 많아서요." 이도훈이 답했다. 강서윤은 검을 어깨에 걸치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당신이 검을 잡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나 나요?" 강서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 물음에 이도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신입 시절, 그는 강서윤과 함께 던전을 드나든 적도 있었다. 그때는 검이 손에 붙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검집조차 어디 있는지 몰랐다. "이러다 손끝이 굳으면, 다시 잡아도 못 쓸 거예요." 강서윤이 낮게 덧붙였다. 그 말은 경고처럼 들렸지만, 걱정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이도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벗어났다. +++ 그날 오후, 서고를 정리하던 이도훈은 낡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먼지가 두껍게 쌓인 상자였다. 얼마나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 뚜껑을 여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뚜껑을 열자 오래된 지도 뭉치가 나왔다. 그가 신입 시절, 직접 표시해 둔 던전 위치들이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고, 잉크는 군데군데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필체만은 또렷했다. 지도 한구석엔 그의 필체로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언젠가 여기 다 가보겠다.'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도를 손끝으로 쓸었다. 창설 초기, 그는 매일 새로운 던전을 찾아다니는 게 즐거웠다. 위험했지만 살아있었다. 새벽에 던전 입구에 서서 미지의 어둠을 들여다볼 때,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였다. 지금은 위험하지 않았다. 그저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서류 밑에서. 숨은 붙어 있었지만, 그 안의 무언가는 이미 오래전에 멈춰버린 것 같았다. 마법사 한소이가 서고 문 앞을 지나가다 그를 발견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한소이가 무심하게 물었다. "옛날 지도예요." 이도훈이 지도를 들어 보였다. 한소이는 잠시 지도를 훑어보고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지도 귀퉁이에 적힌 메모에 잠깐 머물렀다. "그리움은 병이에요, 마스터님." 그녀가 말했다. "병이라니, 너무 심한 말이네요." 이도훈이 애써 웃으며 받았다. "병은 낫지 않으면 커져요. 그것뿐이에요." 한소이는 그렇게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박혔다. +++ 그날 밤, 이도훈은 집무실에 앉아 다시 그 지도를 펼쳤다. 서류는 뒤로 밀어두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도 위에 표시된 붉은 점들을 손끝으로 하나씩 짚어보았다. 각각의 점마다 기억이 따라붙었다. 저 던전에서는 처음으로 상급 몬스터를 잡았고, 저 던전에서는 사흘을 굶으며 길을 헤맸다. '한 달만이라도.' 그는 생각했다. '한 달만이라도, 예전처럼 걸어보고 싶다.' 그 생각은 며칠 동안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도, 결재를 할 때도, 그 지도 한 귀퉁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서명을 하다가도 손이 멈췄다. 잠깐이지만, 펜 끝이 종이 위에서 흔들렸다. 성녀 윤채아가 그의 앞에 차를 내려놓은 것은 그 무렵이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그의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걷혔다. "요즘 표정이 다르세요." 윤채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가요." 이도훈이 애매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든, 말씀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늘 그랬다. 캐묻지 않으면서도,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도훈은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결심이 완전히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을 꺼내면, 돌이킬 수 없어질 거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 결심이 선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늑대 수인 길잡이 미류가 냄새를 맡듯 그의 곁으로 다가와 코를 킁킁거렸다. 그녀의 코끝이 그의 옷깃 근처에서 몇 번이나 움직였다. "주인님, 요즘 냄새가 이상해요." 미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냄새라니요." 이도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결심한 냄새요." 미류의 눈이 반짝였다. "결심에서 냄새가 나나요?" 그가 되물었다. "나요. 오래 묵은 흙냄새 같은 거예요. 뭔가 파묻어뒀던 걸 다시 꺼낸 냄새." 미류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이도훈은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결심했다.' 그는 그렇게 속으로 정리했다. '한 달, 딱 한 달만.' 서류는 다시 밀려나 있었다. 대신 지도가 책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지도를 다시 접어 품에 넣었다. 접힌 지도의 감촉이 가슴께에 닿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무게였다. 그리고 다음 날, 창설 멤버 전원을 회의실로 불러 모으기로 마음먹었다. 삼 년 만의, 자신만을 위한 계획이었다. 그는 회의실 문을 떠올리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 계획이 얼마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힐지 아직 짐작하지 못했다. 지도 한 장에 담긴 낡은 소망이, 곧 길드 전체를 뒤흔들 태풍이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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