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천율성 북쪽 별원, 인적이 드문 야심한 시각이었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흐렸다. 바람은 차가웠고, 마른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는 소리가 간간이 어둠을 갈랐다. 처마 밑에 선 서채림은 옷깃을 여미며 주위를 살폈다. 붉은 등롱 하나가 바람에 흔들려 서걱,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도 그녀의 어깨는 움찔했다. 발끝이 시렸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는지 알 수 없었다.
"늦었군."
낮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이헌이었다. 천율제국 아홉째 왕자, 황족의 위엄을 두른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했다.
"…아버님이 오늘도 절 놓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서채림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녀는 천율성 제일 미인이라 불렸지만, 지금 이 순간의 얼굴은 창백하고 텅 빈 것에 가까웠다. 입술은 말라 있었고, 손끝은 소맷자락 안에서 가만히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결심은 섰나?"
이헌이 다가섰다. 발소리 하나 없이, 마치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그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그 아래 도사린 계산은 서채림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정확했고,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희생시켜야 하는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강 공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 말입니까."
"공자라니, 정이 남았나 보군."
이헌이 피식 웃었다. 조소인지 확인인지 구분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서채림은 그 웃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청매죽마로 자란 강도진과의 세월이, 지금 이 순간에는 오히려 짐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함께 나무를 타다 무릎이 깨졌을 때, 그가 제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감싸주던 손길이 아직도 선연했다. 그 손을, 지금 그녀는 배반의 도구로 써야 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이야기가 끝났으면 서둘러야지."
서경택이었다. 서채림의 아버지이자 서가의 가주.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눈 밑의 그늘은 며칠 밤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의 것이었다.
"채림아. 네 오라비 명후가 시위대 수장으로 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서가를 지킬 수 없다. 황실이 원하는 걸 내놓아야 우리 가문이 산다."
"…잔월옥 말씀이십니까."
서경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딸을 보는 아버지의 눈이 아니었다. 계산하는 자의 눈이었다. 딸의 얼굴이 아니라 딸이 쥔 패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강씨 가문의 전승 보물이라지. 강태산 그 늙은이가 백 년 전 은거하며 남긴 것. 폐하께서는 그것이 필요하다 하셨다."
서채림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목갑에 담긴 그 작은 옥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강도진이 얼마나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 공자가… 그것을 늘 품에 지니고 다닌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안다. 그러니 네가 나서야지. 그와 가장 가까운 이가 너다."
정적이 흘렀다. 등롱의 불빛이 흔들렸다. 서채림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꺼풀 안쪽으로 어린 시절의 강도진이 스쳤다. 그리고 그 위에, 아버지의 초조한 얼굴과 이헌의 서늘한 눈이 겹쳐졌다.
"…알겠습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말을 뱉는 순간 그녀의 손끝은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 한마디에 이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현명한 선택이다. 서가에도, 그대에게도."
그는 더 말을 잇지 않고 몸을 돌렸다. 어둠 속으로 그의 그림자가 스며들듯 사라졌다.
***
같은 시각, 강씨 저택.
강도진은 마당에 서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스무 살, 진기 육중의 경지에 오른 그의 몸놀림에는 절도가 있었다. 서걱, 검이 바람을 갈랐다. 다시 한번, 서걱―. 그의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지만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달빛이 검신 위로 미끄러지듯 흘렀다.
숨을 고르며 그는 잠시 검을 늘어뜨렸다.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어딘가에서 풀벌레 소리가 낮게 이어지고 있었다.
"공자님, 서채림 아가씨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시종이 다가와 서신을 건넸다. 강도진의 손이 멈췄다. 검을 거두는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채림의 이름만 들어도 그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서신을 펼쳐 읽는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내일 저녁, 후원 별당에서 뵙고 싶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강도진은 그 안에 담긴 무게를 알아챌 수 없었다. 그는 서신을 접어 품에 넣었다. 잔월옥이 담긴 낡은 목갑도 함께, 늘 그러하듯 옷 속 깊은 곳에 자리했다. 목갑의 표면은 오랜 세월 손길에 닳아 반들거렸다. 조부의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했다. 그는 그것을 품에 지닐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별일 없겠지."
중얼거림이었다. 시종은 대답 없이 물러났고, 강도진은 다시 검을 들어 마지막 몇 초를 그었다. 서걱, 서걱―. 검이 어둠을 가르는 소리만이 마당에 남았다.
그러나 그 밤, 강도진은 알지 못했다.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정情이 아니라 함정이라는 사실을. 채림의 글씨체는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했고, 그 안에 숨겨진 것을 그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
다음 날 저녁, 후원 별당.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가 이내 어둡게 가라앉았다. 등불 하나만 켜진 방 안에서 서채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무릎 위에서 서로를 꼭 붙잡고 있었다. 강도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채림아, 무슨 일이냐."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서채림의 안색이 유독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살피듯 바라보았다.
서채림은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진아… 미안해."
"…뭐가?"
강도진의 눈썹이 살짝 좁혀졌다. 그녀의 손끝이 얼음처럼 차갑다는 걸 그제야 느꼈다.
그 순간, 문밖에서 발소리가 어지럽게 몰려들었다.
"거기 있다!"
외침과 함께 문이 부서졌다.
퍽―
갑주를 두른 병사들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강도진은 반사적으로 서채림을 등 뒤로 감쌌다. 그의 손이 검자루로 향했다가, 병사들의 수를 가늠하며 멈췄다.
"이게 무슨…"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낯익은 얼굴이 병사들 뒤에서 걸어 나왔다. 이헌이었다. 여유로운 걸음,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표정이었다.
"강도진. 일곱째 공주의 처소에 무단으로 들어가 그녀를 능욕한 죄, 인정하는가?"
강도진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그가 서 있는 이곳이 후원 별당이 아니라는 걸, 벽에 걸린 낯선 자수와 향로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익숙했던 방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언제, 어떻게 이곳으로 바뀌었는지조차 그는 알지 못했다.
"…여기가, 어디냐."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시선이 서채림에게 닿았다. 답을 구하듯. 그러나 서채림은 그의 손을 놓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발걸음은 이미 병사들 쪽을 향해 있었다.
"채림아…?"
서걱―
누군가의 검이 뽑히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강도진은 온몸의 감각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병사들의 창끝이 그를 향해 좁혀들었고, 이헌의 입가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함정이었다. 그리고 그 함정의 문을 열어준 것은, 다름 아닌 서채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