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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서인의 손에 들린 부채가 미세하게 떨렸다. 비단 위에 그려진 매화 문양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오직 도윤 자신뿐이었을 것이다. 서인은 곁의 시녀에게 무언가 짧게 지시하는 척하며 시선을 애써 다른 곳으로 돌렸으나, 그 눈동자는 이미 도윤을 향해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마치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려다 결국 제자리로 흘러가는 물고기처럼, 그녀의 시선은 몇 번이고 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도윤은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두려움 대신 낮게 깔린 냉소가 그의 입가에 스치는 것을, 서인은 분명히 보았을 터였다. 저택에서라면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을 노예가, 지금은 마치 이곳이 제 자리인 양 태연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 광경인가. 도윤은 속으로 되뇌었다. 한때는 그녀의 발치에서 밥그릇조차 제대로 받아먹지 못하던 자신이, 지금은 같은 공간의 공기를 나눠 마시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인의 얼굴에 서린 당혹감은 값어치가 있었다. "저기, 저 사람..." 근처에 있던 귀부인 하나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어디 가문 사람이지? 낯이 익질 않네." "글쎄, 나도 처음 보는데. 옷차림은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저런 얼굴을 어디서 못 보고 지나쳤을까.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소문은 순식간에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사내라는 것 자체가, 폐쇄적인 사교계에서는 충분한 흥밋거리였다. 부채 뒤로 숨긴 입술들이 저마다 다른 추측을 속삭였고, 그 속삭임은 등불의 그림자처럼 무도회장 이곳저곳으로 번져갔다. 도윤은 그 시선들을 받으며 오히려 등을 곧게 펴고 걸었는데, 그것은 오래도록 몸에 익은 굴종의 자세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턱을 들고, 시선을 낮추지 않으며, 걸음마다 힘을 실어 딛는 것. 노예로 살아온 세월 동안 배운 것은 시선을 피하는 법과 발소리를 죽이는 법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습관을 거스르는 데서 오는 묘한 쾌감이 그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도윤의 팔을 슬쩍 붙잡았다. 놀란 도윤이 돌아보니, 낯선 얼굴의 젊은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훗날 하은이라는 이름으로 몰래 이 자리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도윤조차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만큼 화려하게 꾸며진 모습이었다. 머리는 정교하게 틀어 올려 진주 장식이 촛불에 반짝였고, 두 볼에는 옅은 분이 발려 평소의 수더분한 인상을 완전히 지워냈다. 시녀의 낡은 옷 대신 어디선가 빌린 듯한 수수한 드레스를 걸친 하은은, 도윤 곁으로 다가와 팔짱을 슬쩍 끼웠다. "당신, 오늘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저와 한 곡 추시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하게 주변에 퍼졌다. 도윤은 순간 당황했으나, 하은의 눈빛에서 그것이 자신을 돕기 위한 즉흥적인 연기임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이 위험한 도박에서 오는 흥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음악이 흐르는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두 사람이 걸어 나가자, 주변의 시선이 잠시나마 도윤에게서 하은과의 관계라는 새로운 흥밋거리로 옮겨갔다. 몇몇 부인들은 이미 두 사람을 두고 새로운 소문의 실타래를 짜기 시작한 듯했고, 그 시선의 무게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것을 도윤은 등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도윤은 서투른 걸음으로 하은을 따라 몸을 움직이며, 그녀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이렇게라도 시간을 벌어야 해. 사람들 눈이 너무 많아." "고마워." 도윤이 낮게 답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 화려한 공간 한복판에서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주목받는 존재가 된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그것이 마치 오래도록 굶주려온 짐승이 처음으로 배를 채운 것과 같은 낯선 만족감을 그의 안에 채워 넣었다. 발끝이 마루를 딛는 감각조차 낯설었다. 사슬에 묶여 걷던 발이, 지금은 음악의 박자에 맞추어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촛불의 황금빛이 하은의 진주 장식 위로 부서지듯 흩어졌고, 그 빛이 도윤의 눈에는 오래도록 잊고 있던 어떤 온기처럼 다가왔다. "긴장하지 말아요." 하은이 다시 속삭였다. "당신, 지금 잘하고 있어." 도윤은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웃음이라는 것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새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음악이 잦아들며 춤이 끝나는 순간, 무도회장 입구 쪽에서 갑작스러운 정적이 물결처럼 번져 나갔다. 방금까지 웅웅거리던 속삭임들이 일순간 잦아들었고, 그 침묵은 마치 거대한 손이 소음을 움켜쥐어 짓누르는 것처럼 무도회장 전체를 메워갔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백작, 강태준 나리께서 입장하십니다!" 도윤의 등줄기가 순식간에 서늘하게 곤두섰다. 하은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그녀도 느낀 듯 얼굴이 굳어졌다. 화려한 인파가 좌우로 갈라지며 만들어진 길 끝에서, 태준이 위엄 넘치는 걸음으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걸음마다 검은 정장의 자락이 흔들렸고, 그 모습은 마치 사냥터에 발을 들인 맹수가 먹잇감의 흔적을 찾아 걸어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훑다가, 마침내 도윤이 서 있는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무도회장을 가득 채우던 촛불의 황금빛조차 순간 빛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고, 오직 태준과 도윤 사이에 흐르는 시선만이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태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벌겋게 차오르는 것을, 도윤은 그 짧은 순간에 똑똑히 보고 말았다. 턱 근육이 단단하게 조여지며, 굳게 다물린 입술 사이로 낮게 이 가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듯했다. 그것은 분노도 아니었고 단순한 놀람도 아니었다. 마치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눈앞에 나타난 것을 확인한 자의 얼굴이었다. 하은의 손끝이 도윤의 팔을 붙잡은 채 미세하게 떨려왔다.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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