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무도회 준비가 한창인 저택은 온통 소란과 향수 냄새로 뒤섞여 있었다. 하녀들이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드레스를 나르고, 다리미 냄비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복도를 메웠으며, 마부들이 마차를 손질하는 소리가 밤공기를 채웠다. 저택의 정원에서는 정원사들이 마지막으로 촛대에 불을 붙이느라 분주했고, 부엌에서는 그릇 부딪는 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모든 것이 오늘 밤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백작가의 위세를 온 사교계에 다시 한번 새겨 넣는 밤.
그 소란의 한가운데서, 정작 그 소란과는 무관한 얼굴로 도윤은 하인들의 숙소 뒤편 창고로 향했다. 낡은 나무문을 밀자 삐걱, 하고 오래된 경첩이 앓는 소리를 냈다. 창고 안은 곰팡이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몇 년째 열어보지 않은 궤짝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도윤은 그 사이를 헤집어 태준의 낡은 예복 한 벌을 꺼내 들었다. 몇 년 전 유행이 지나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옷이었으나, 어둠 속에서는 그 낡음이 그리 눈에 띄지 않을 것이었다.
소매를 걷어 팔에 걸쳐보니 옷은 헐렁했다. 어깨선이 처지고, 팔 길이도 손끝을 훌쩍 넘겼다. 그러나 도윤은 개의치 않고 허리춤을 천 조각으로 조이며 몸에 맞게 다듬었다. 거친 손끝이 고급스러운 벨벳의 결을 매만지는 순간, 이상하게도 심장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무언가를 되찾는 듯한 감각이었다.
*이 옷을 입는 순간부터, 나는 도윤이 아니다.*
그 생각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대사처럼 자연스럽게 입안에서 굴러 나왔다. 그는 창고 한 귀퉁이에 세워진 깨진 거울 조각 앞에 서서 옷매를 살폈다. 금이 간 유리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인의 얼굴이 아니라, 어딘가 귀족의 핏줄을 이어받은 듯한 얼굴. 물론 그것은 착각일 뿐이었으나, 오늘 밤만큼은 그 착각을 믿어보기로 했다.
"정말 이럴 거야?" 하은이 창고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며 속삭였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과 흥분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등불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만이 유난히 반짝였다. "들키면 그땐 매로 끝나지 않을 거야. 너도 알잖아. 저 집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들키지 않을 거야." 도윤이 옷깃을 정리하며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확신이 배어 있었다. 흔들림 없이, 오히려 단단하게 굳어진 목소리였다. "오늘 밤, 나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야."
하은은 그 말에 무언가 더 하고 싶었으나, 도윤의 눈빛이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음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 눈빛은 하은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겁도, 망설임도, 흔한 하인의 눈에 담기는 순종의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무언가를 향해 이미 발을 내디딘 자의 눈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 눈을 마주 보다가, 이내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낡은 목걸이를 풀어 도윤의 손에 쥐여주었다. 값싼 금속에 유리알을 박아 넣은, 별것 아닌 장신구였지만 하은에게는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었다.
"이거라도 걸어. 그래야 조금이라도 사람처럼 보일 거야."
도윤은 잠시 그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위에서 흔들리는 그 낡은 것이, 오늘 밤 그가 걸칠 수 있는 유일한 사치품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그의 목을 조여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목걸이를 걸었다. 차가운 금속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한층 더 선명해지는 듯했다.
"고마워." 도윤이 짧게 말했다. 하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가 볼세라 얼른 창고 문을 닫고 사라졌다.
왕궁 무도회장은 저택에서 마차로 반 시간 거리였다. 도윤은 초청받은 하인들의 짐마차 뒤편에 몰래 몸을 숨긴 채, 흔들리는 마차 바닥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흐릿하게 흩어져 있는 그 밤,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지날 때마다 몸이 덜컹거리며 흔들렸고, 그 진동이 고스란히 등뼈를 타고 올라왔다. 옆에 쌓인 짐짝들 틈에서 그는 숨을 낮추고 몸을 웅크렸다. 마부의 발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뒤섞여 들려올 때마다 심장이 한 번씩 크게 뛰었으나, 그것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기대에 가까운 떨림이었다.
*돌아갈 곳은 이미 없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아직 온전히 알지 못했으나, 돌아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마차가 왕궁 쪽으로 다가갈수록, 저 멀리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점점 환해질수록, 그의 안에서 어떤 갈증 같은 것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마차의 덜컹거림에 맞춰 조금씩 깨어나는 것 같았다.
무도회장에 도착한 도윤은 하인들의 눈을 피해 뒷문으로 잠입했다. 부엌 쪽문을 지나 좁은 통로를 따라 걸으며, 그는 냄새로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를 짐작했다. 고기 굽는 냄새와 향초 냄새가 서서히 진해지고, 이내 현악기의 선율이 벽을 타고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 문을 지나쳐, 화려한 불빛이 쏟아지는 대연회장의 가장자리로 슬며시 스며들었다.
샹들리에의 황금빛이 대리석 바닥 위로 쏟아지고, 현악기의 선율이 공기를 가득 채우는 그 공간은, 도윤이 태어나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 세계였다. 천장에는 금박을 입힌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고, 벽마다 걸린 촛대들은 하나같이 은으로 만들어져 있어 그 광채만으로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는 비단과 벨벳이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향수 냄새가 옅게 퍼져 나갔다.
귀족들의 웃음소리와 잔이 부딪는 소리 사이로, 도윤은 자신이 얼마나 낯선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발끝이 대리석 바닥을 스칠 때마다, 자신의 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는 것 같아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화려한 인파 속에서, 낡은 예복을 걸친 사내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 낯섦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짜릿한 흥분으로 변주되었다. 그는 턱을 살짝 들고 걸음을 옮겼다. 뱀이 풀숲을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도윤은 화려한 인파 사이를 헤치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시선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마치 사냥감을 찾는 짐승의 눈처럼 연회장 곳곳을 훑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 무리 지어 담소를 나누는 귀부인들, 술잔을 손에 든 채 웃음을 터뜨리는 청년들. 그 모든 풍경이 그에게는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한 데가 있었다.
*이 세계가 원래 나의 것이었다면, 오늘 밤만이라도 되찾겠다.*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걸어오던 한 여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백작 부인의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멎었고, 그녀의 시선이 도윤의 얼굴에 못 박힌 채 굳어버렸다. 주위를 감싸던 시녀들도 영문을 모른 채 걸음을 멈추었고, 잠시 그 자리에는 이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윤서인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를 잃은 석고처럼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도윤은 놀랍도록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그녀의 손끝이 부채를 쥔 채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고, 입술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벌어졌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존재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전 묻어둔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눈에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연회장의 선율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그 모든 소음을 뚫고 지나가는 팽팽한 침묵이 자리를 잡았다. 도윤은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온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