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2화. 새 이름
다음 날 아침, 나는 어깨의 붕대를 갈다가 거울을 처음 봤다.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손거울이었다. 낡은 은테에 유리는 조금 흐렸고, 가장자리에는 녹이 슬어 거뭇하게 얼룩져 있었다. 딱 봐도 오래된 물건이었다. 그래도 그 안에 비친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은발이었다. 빙하처럼 새하얀, 아니 그보다 더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었고, 눈은 파란색이었다. 파란색이라기보다 얼음 조각을 눈알 자리에 박아놓은 것 같은 색이었다.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이목구비는 어딘가 인공적으로 다듬어놓은 것처럼 균형이 잡혀 있었다.
귀족 도련님 상이었다. 그것도 게임 일러스트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거울을 좀 더 가까이 가져가 봤다. 손이 떨렸다. 붕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나도 몰랐다. 뺨을 꾹 눌러봤다. 말랑했다. 사람 피부였다. 당연한 걸 확인하면서도 이상하게 안도가 됐다.
뭐야, 이거. 나 만렙 캐릭터 얼굴 뽑기 한 거야.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원래 얼굴보다 백배는 나았다. 사실 이런 상황에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좀 한심하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사람은 궁지에 몰려도 얼굴 걱정은 하는 법이다. 나는 거울 속의 낯선 얼굴을 손가락으로 몇 번 더 눌러보다가, 이내 관두었다. 지금 얼굴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나."
이준혁이었다. 나는 거울을 얼른 담요 밑으로 밀어 넣고 침대에 몸을 다시 눕혔다. 아픈 척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다친 건 진짜니까 연기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가련해 보이는 게 나았다. 열두 살짜리 부상당한 고아 컨셉이면 동정표 좀 받아야지.
문이 열리고 이준혁이 들어왔다. 손에는 나무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빵과 스프 비슷한 게 담겨 있었다. 어제 어두운 데서 봤을 때보다 얼굴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각진 턱, 짧게 깎은 검은 머리, 눈매가 날카로운 남자였다. 나이는 삼십 대 초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이 마을에서는 꽤 신분이 있는 사람 같았다. 어제 나를 활로 쐈던 사람치고는 옷차림이 단정했다.
"먹을 수 있겠나."
"...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깨가 욱신거렸다. 실제로 아파서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는데, 그게 오히려 연기에 도움이 됐다. 이준혁은 쟁반을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내려놓고,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나무 의자가 바닥에 끌리며 스크륵, 소리를 냈다. 방 안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이름을 다시 물어보지. 정말 기억이 안 나나?"
"...네. 죄송해요."
죄송할 일도 아닌데 죄송하다는 말이 자동으로 나왔다. 어른들 상대할 때 몸에 밴 습관이었다. 이준혁은 팔짱을 끼고 나를 한참 바라봤다.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뭔가를 재고 있는 눈빛이었다.
"이름도, 가족도, 어디서 왔는지도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건데."
"네."
"머리 색이나 눈 색을 보면 귀족 혈통 같은데. 이 근방에서 그런 색을 가진 가문은 들어본 적이 없다."
망했다.
이거 진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혁은 생각보다 관찰력이 좋았고, 생각보다 논리적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조연이었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훨씬 더 만만치 않았다. 원작에서 이 사람이 어떤 역할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솔직히 잘 떠오르지 않았다. 초반 마을 NPC 정도로만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그게 문제였다. 스쳐 지나간 캐릭터일수록 나한테는 정보가 없다는 뜻이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눈을 떴을 때 숲이었고, 화살이 날아왔고..."
일부러 목소리를 떨리게 냈다. 어차피 어린애의 몸이니 떨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눈가에도 힘을 좀 줬다. 눈물까지는 못 짜냈지만 눈시울 정도는 붉어졌을 거라고 믿었다. 이준혁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괜찮다. 급하게 물을 필요는 없지."
그가 스프 그릇을 내 쪽으로 밀었다.
"먹어라. 얘기는 몸이 나은 뒤에 다시 하지."
나는 스푼을 들고 스프를 떠먹었다. 짭짤하고 뜨거운 맛이었다. 감자와 뭔지 모를 뿌리채소가 듬성듬성 들어 있었고, 향신료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다. 세련된 맛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순식간에 절반을 비웠다. 빵도 한 조각 뜯어 스프에 적셔 먹었다. 딱딱했다. 이가 아플 정도로 딱딱했는데, 스프에 적시니 그럭저럭 먹을 만해졌다.
먹는 나를 지켜보던 이준혁이 문득 물었다.
"이름이 없으면 곤란하지. 임시로라도 부를 이름이 필요한데."
"...제가 정해도 되나요?"
"그래."
순간 여러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다. 정하준 그대로 쓸까 하다가, 성씨가 이 세계에서는 너무 튈 것 같아서 관뒀다. 이 세계 사람들 이름을 떠올려봤다. 게임 속 등장인물들 이름이 대부분 성 없이 한 단어로 불렸던 게 생각났다. 다행이었다. 굳이 성씨를 지어낼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나는 원래 이름의 한 글자만 남기기로 했다.
"하준. 그냥 하준이라고 불러주세요."
이준혁이 이름을 몇 번 되뇌었다.
"하준. 좋은 이름이군."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통과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게, 나 자신도 좀 우스웠다. 이름 하나 정하는 데 첩보전 치르듯 머리를 굴리다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하다가 다시 돌아봤다.
"내일 교회에서 사람을 불러올 생각이다. 상처를 제대로 봐야지. 내가 뽑은 화살촉이 완전히 깨끗하게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어서."
"화살촉이... 안에 남아있어요?"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마법 화살이었으니."
마법 화살.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여기가 진짜 게임 세계라는 확신이 그 순간 완전히 굳어졌다. 마법이 실재하는 세계. 그리고 나는 그 마법이 걸린 화살에 맞았다. 어깨의 상처를 슬쩍 만져봤다. 붕대 위로도 열감이 느껴졌다. 단순한 염증인지, 아니면 마법 화살 특유의 뭔가가 남아있는 건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괜찮을까요?"
"교회의 치유사가 오면 알겠지. 소하 마을에 실력 좋은 수녀가 있다고 들었다."
소하 마을.
그 이름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다. 확실치는 않았다. 게임 초반 지역 이름이 소하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하기야, 이 게임을 마지막으로 플레이한 게 언제였더라. 대학 시험 기간에 스트레스 풀겠다고 몰래 켰다가 밤새운 기억은 있는데, 세부 설정까지 완벽하게 기억할 리가 없었다. 지역 이름, 인물 관계도, 스토리 전개까지 다 외우고 있었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불안해하지도 않았을 거다.
어쨌든 확실한 건, 나는 지금 낯선 곳에 떨어졌고, 이 낯선 곳은 내가 알던 게임의 일부이며, 나는 그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준혁이 방을 나가고 나서, 나는 남은 스프를 마저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현실로 돌아갈 방법은 아직 모른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이 몸으로 이 세계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자리를 잡는 것뿐이었다.
이준혁이라는 사람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화살을 쏜 건 오해였고, 오해가 풀린 뒤로는 오히려 과할 정도로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스프를 챙겨주는 것도, 교회 치유사를 불러주겠다는 것도, 어린애 하나 그냥 내버려두면 그만인데 굳이 여기까지 신경 쓰는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다. 물론 사람 좋다고 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이런 세계에서는.
이 사람 밑에서 지낼 수만 있다면, 당장의 생존은 해결될 것 같았다. 집도 있고, 밥도 나오고, 게다가 이 정도로 신경 써주는 보호자라면 최소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걱정은 없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래 나를 믿어줄 것인가였다.
기억상실이라는 카드는 한 번 쓰면 계속 유지해야 하는 카드다. 어딘가에서 삐끗하면 그날로 끝이다. 나는 남은 스프를 마저 비우며,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머릿속에 정리했다.
말투. 지식. 반응.
말투는 이미 최대한 어린애처럼 순화시키고 있었다. 존댓말도 또박또박, 질문에는 짧게. 그런데 가끔 나도 모르게 어른스러운 어휘가 튀어나올 뻔한 순간이 있었다. 아까도 하마터면 "확인 좀 해봐야겠네요" 같은 말이 나올 뻔했다. 다행히 삼켰지만, 다음번에도 삼킬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했다.
지식도 문제였다.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애매하게 많다는 게 오히려 위험했다. 완전히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하면 그만인데, 어설프게 알고 있으니 자꾸 아는 척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소하 마을이라는 이름을 듣고 반사적으로 반응했던 것처럼. 앞으로는 그런 반응도 최대한 죽여야 했다.
그리고 특히 반응이 문제였다. 나는 스물세 살 성인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진 채 열두 살 아이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른스러운 반응이 튀어나올지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위기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침착하게 대응해버리면, 그것 자체가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이 될 터였다. 열두 살짜리 애가 화살 맞고도 상황 판단을 그렇게 잘하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겠나.
붕대를 다시 감으면서, 나는 창밖을 봤다. 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지붕들, 흙길, 멀리 보이는 밭. 평화로워 보였다. 너무 평화로워서 오히려 불안했다. 이런 조용한 마을에서 시작해서 결국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게 이런 류의 세계관에서는 정해진 수순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문제는, 바로 다음 날 현실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