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게이머 출신 남작가 양자

1화

모니터 속으로 손이 빨려 들어가던 순간, 나는 배지은의 전화를 씹고 있었다. 부재중 3통. 마지막 메시지는 '얘기 좀 하자'였다. 무슨 얘기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짐작이 갔기 때문에 더 받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자는 말을 이렇게 예고하고 하는 사람도 있나 싶었는데, 배지은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매사에 절차를 중요하게 여기는 타입. 통보하기 전에 미리 경고를 해주는, 나름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배려를 무시하기로 했다. 헤드셋을 고쳐 쓰고 레이드 큐를 다시 돌렸다. 강여울 여왕 공략 8번째 시도였다. 이 게임에서 제일 짜증나는 보스이자, 제일 예쁜 년이었다. 패턴 하나만 더 외우면 클리어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매번 그 하나가 안 됐다. 파티원들은 벌써 세 명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있었다. 채팅창에는 "이번엔 진짜 간다", "3초만" 같은 말들이 떠다녔다. 나는 그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 다만 나 자신도 딱히 믿음직스럽진 않았다. 화면이 갑자기 하얗게 번쩍였다. 뭐야, 이거. 그게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기억나는 생각이었다. 다음 순간 손끝에서부터 몸이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있었다. 팔이 늘어나는 느낌, 그리고 늘어난 팔 끝이 어딘가에 닿는 느낌. 모니터 유리는 원래 딱딱해야 하는데 그날은 젤리처럼 물컹했다. 저항감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냥 스며들듯이 빨려 들어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지른다 해도 소용없었을 거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숲 한복판에 서 있었다. 나무 냄새, 젖은 흙 냄새. 도시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종류의 공기였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3초쯤 걸렸다. 나뭇잎 사이로 빛이 부서져 들어오는 방식, 발밑에서 부러지는 잔가지 소리, 어딘가에서 우는 새소리. 게임 그래픽이 아무리 좋아졌다 한들 이 정도로 세밀할 수는 없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작았다. 손이, 이상하게 작았다. 뭐지. 손등을 뒤집어 봤다. 손가락이 가늘고, 손톱이 반질반질하고, 무엇보다 손 크기 자체가 원래 내 것보다 훨씬 작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몸을 내려다봤다. 옷은 낯선 재질의 흰 셔츠와 갈색 바지였고, 그 안에 든 몸은 확실히 성인의 몸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짧고, 가슴팍이 얇았다. 신발도 발보다 한 치수 큰 것처럼 헐렁했다. 망했다. 뭐가 어떻게 망한 건지도 모르는 채로 일단 그렇게 생각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면 일단 망했다고 해두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나는 스물세 살이었다. 이 몸은 아무리 봐도 열두 살짜리였다. 키를 가늠해보려고 옆에 있는 나무에 손을 대봤다. 내 어깨 높이가 성인 남성 허리께에도 못 미쳤다. 일단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봤다. 다 움직였다. 다행이다. 최소한 마비는 아니었다. 그때 화살이 날아왔다. 피융.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뭔가 뜨거운 것이 어깨를 뚫고 지나갔다. 통증은 그 다음에 왔다. 처음엔 그냥 세게 부딪힌 줄 알았다. 그런데 어깨를 내려다보니 화살대가 박혀 있었다. 그제야 통증이 제대로 왔다. 나는 소리도 못 지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야가 흔들리고, 입에서는 신음도 아닌 이상한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뜨겁다는 감각과 차갑다는 감각이 동시에 밀려왔다. 피가 셔츠를 적시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움직이지 마라!" 목소리가 들렸다. 굵고, 낮고, 명령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갑옷을 입은 남자가 활을 겨눈 채 다가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얼굴선이 날카로웠다. 눈빛이 사냥감을 확인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갑옷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게 뭘 뜻하는지는 그 순간 알 도리가 없었다. 적국의 정탐꾼인 줄 알았겠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랬다. 이 근방은 전쟁 통이었고, 숲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은 대부분 첩자였다. 어른의 몸으로 나타났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화살 한 발로 끝내는 게 이 세계에서는 흔한 처리 방식이었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을 확인했다. 몇 걸음 거리. 활시위는 여전히 팽팽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숨을 죽인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렇게 됐다. "...아이?" 표정이 바뀌는 걸 나는 거의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확신에서 당혹으로, 당혹에서 낭패로. 활을 든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런." 짧은 탄식이었다. 그 한마디에 담긴 뉘앙스가 참 여러 가지였다. 방금까지 죽이려던 상대가 아이였다는 데서 오는 당혹감, 그리고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하는 난감함까지. 나는 어깨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마지막으로 본 건 남자가 무릎을 꿇고 내 쪽으로 손을 뻗는 모습이었다. 손이 크고, 손등에 흉터가 몇 개 있었다. 그 남자가 이준혁이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 나는 딱 하나의 생각만 붙잡고 있었다. 이 세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 숲의 배치, 나무의 형태, 심지어 방금 들린 남자의 목소리 톤까지도. 그러니까, 이거 내가 하던 그 게임 아닌가. 확신은 없었다. 확신할 정신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나무 침대 위였다. 천장이 낮고, 통나무를 그대로 얹어 만든 것 같은 구조였다. 옆에는 낡은 촛대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촛불이 흔들리며 방 안 그림자를 늘였다 줄였다 했다. 벽에는 걸어놓은 마른 약초 다발 같은 게 보였고, 창문 하나 없는 방이었다. 어깨는 여전히 아팠지만, 화살이 박혔던 자리는 천으로 감겨 있었다. 누군가 나를 여기까지 옮기고, 치료까지 해줬다는 뜻이었다. 천장을 보며 숨을 골랐다. 들이쉬고, 내쉬고. 몸이 어려서 그런지 숨소리도 낯설었다. 폐활량 자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여기가 어디든, 일단 죽지는 않았다. 그거면 됐다. 문이 끼익 열렸다. 끼익. 이준혁이었다. 갑옷은 벗고 대신 평범한 셔츠 차림이었는데, 그래도 어깨가 벌어진 체구는 그대로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손에는 물그릇 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 방에 들어서면서 그걸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정신이 드나." 존댓말도 아니고 완전한 반말도 아닌, 애매한 말투였다. 상대의 신분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을 때 쓰는 어중간한 어투 같았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고개만 끄덕였다. 목소리를 내면 이상할 것 같았다. 실제로 이상했다. 나중에 처음 말을 뱉었을 때, 내 귀에 들린 건 분명 변성기 전 아이의 목소리였다. "이름이 뭐지." 짧은 질문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정하준이라고 하면 되나. 여기서? 이 세계에서? 성씨부터 이상하게 들릴 텐데. 애초에 이 나라 사람들 이름이 어떤 식인지도 모르는데 잘못 대답했다간 바로 의심을 살 게 뻔했다. "...몰라요."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었다. 그런데 뱉고 나니 오히려 그럴싸했다. 기억이 없다고 하면, 최소한 의심은 조금 덜 받을 것 같았다. "몰라?" 이준혁의 눈썹이 좁혀졌다.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딱 심문하는 사람의 자세였다. "기억이... 안 나요. 여기가 어딘지도, 제가 왜 여기 있었는지도." 반쯤은 진심이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딘지는 사실 나도 몰랐다. 다만 어떤 세계인지는 짐작이 갔을 뿐이다. 게임 세계관 설정집을 정독한 것도 아니고, 그저 플레이하면서 스쳐 지나가듯 본 배경 설정 몇 조각이 전부였다. 이준혁은 한참 나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서 피로감이 묻어났다. 전쟁 통에 애까지 신경 써야 하는 처지에 대한 피로감 같은 거였다. "그래. 우선은 상처부터 낫고 얘기하지." "...얼마나 다쳤어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어깨를 관통했다. 다행히 뼈는 비껴갔고." 담담한 어조였다. 사람 몸에 화살 박은 걸 이렇게 사무적으로 말하는 사람 처음 봤다. 아니, 애초에 사람 몸에 화살 박아본 적 있는 사람 자체가 처음이었다. "제가... 죽을 뻔한 거예요?" "그래." 부정도, 위로도 없이 짧은 긍정. 그 말투에서 이 사람이 거짓말이나 돌려 말하는 데는 소질 없는 타입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등을 돌려 방을 나가려 할 때, 나는 그의 등에 대고 물었다. "저기." 그가 돌아봤다. "...감사합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죽을 뻔했다. 실제로 화살 하나 더 맞았으면 그대로 죽었을 거다. 살려줬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감사였고, 동시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말이기도 했다. 이준혁은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끼익. 다시 방 안에 혼자 남았을 때,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참는 것 말고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하나. 나는 열두 살짜리 아이의 몸이 되었다.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스물세 살의 정신이 열두 살의 몸에 들어앉아 있다는 게, 말로는 쉬워도 실감으로는 전혀 안 왔다. 손을 들어보고, 발을 움직여보고, 몇 번을 반복해도 낯설었다. 둘. 여기는 아마도 내가 하던 게임 속 세계다. 숲의 형태, 이준혁이라는 이름, 방금 그가 입고 있던 갑옷의 문양까지. 전부 어디선가 본 것들이었다. 확신하기엔 기억이 흐릿했지만,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겹치는 게 너무 많았다. 셋. 나를 살려준 남자는 게임 속에서 본 적 있는 이름, 이준혁. 남작이었나. 확실치는 않았다. 게임 초반부 서브 퀘스트에 등장했던 조연이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성격이 불같지만 은근히 정 많은 타입이라는 설정. 지금 상황과 얼추 맞아떨어지긴 했다. 화살부터 쏘고 나서 미안해하는 꼴을 보니, 딱 그 설정 그대로였다. 네 번째로 정리해야 할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였다. 기억상실이라는 카드는 이미 던졌다. 되돌릴 수 없다. 이제 남은 건 이 거짓말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그럴듯하게 유지하느냐였다. 걸리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나는 이 몸으로 정탐꾼 혐의를 다시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당장 급한 건 이름이었다. 언제까지고 "몰라요"로 버틸 수는 없을 테니, 이 세계에 맞는 그럴듯한 이름을 하나 지어내야 했다. 문제는 이 세계의 작명 규칙을 전혀 모른다는 거였다. 성이 먼저인지 이름이 먼저인지, 흔한 이름은 어떤 건지, 아무것도. 일단은 몸이 나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다행히 아이의 몸은 회복력이 좋은 편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어깨가 지끈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 몸이 어려서 그런지 회복 속도도, 졸음도 성인의 그것과는 달랐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속도가 스물세 살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다행이다. 일단 이 순간만큼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방문 밖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혁 말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여자 목소리였고, 톤이 날카로웠다. "그 아이, 정말 첩자가 아니라고 확신하십니까."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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