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산길을 사흘째 걷고 있었다.
발바닥은 이미 물집이 잡혀 걸음마다 통증이 스며들었고, 짚신 안쪽은 진작에 피와 진물로 눌어붙어 걸을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짐 속의 마른 식량도 절반 이상 줄어 있었고, 물주머니는 흔들 때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산길 특유의 습기가 옷깃 안까지 스며들어, 걸을 때마다 등판이 축축하게 늘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하다린은 지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걷고 있었다.
작은 어깨에 걸친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도 굳이 나눠 지자는 말 한마디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보고 걸었다. 가끔 발을 헛디딜 때마다 낮게 신음을 흘리는 걸 나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 작은 몸으로 사흘을 버텨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쉬었다 갈까."
"괜찮아. 나 안 힘들어."
입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은 이미 근처 바위를 향해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짐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슬쩍 바위 쪽으로 등을 밀어주며 앉으라는 시늉을 하자, 하다린은 못 이기는 척 주저앉으면서도 끝까지 힘들지 않다는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 모습이 어찌나 뻣뻣한지,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가 웃겨."
"아니, 아무것도."
물주머니를 건네주자 하다린은 두 손으로 받아 조심스레 한 모금을 마셨다. 목재 상자는 여전히 무릎 위에 올려둔 채였다. 저 상자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하다린이 한시도 손에서 떼지 않는 걸 보면 결코 가벼운 물건은 아니었다.
그때, 숲 저편에서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마른 가지가 밟히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섞여드는 사람의 발소리.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며 하다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멈춰라!"
갑작스레 튀어나온 사내 둘이 우리를 향해 화살촉이 달린 창을 겨누고 있었다.
"이 근처 함정은 우리 형제의 사냥터다. 함부로 손댔다간..."
앞선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다가왔다. 다부진 체격과 짧게 깎은 머리, 등에 진 활과 화살통을 보니 이 산을 근거로 삼는 사냥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창끝이 흔들릴 때마다 화살촉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찔러왔다.
"저희는 함정을 건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저 길을 지나던 참이었습니다."
나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최대한 예를 갖추었으나, 상대는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창끝이 슬금슬금 내 목 근처까지 다가왔다.
"강호, 저 상자 안에 있는 게 뭔지 봐야겠는데."
뒤따라온 다른 사내, 강호라 불린 자가 하다린의 목재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대지 마!"
하다린이 상자를 품에 안고 뒷걸음질치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 손으로라도 저 상자만은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창끝은 여전히 내 목 근처에 머물러 있었고,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속에서는 다급함이 차올랐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 팽팽한 순간, 숲의 그림자 속에서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어허, 어린것들 상대로 활 겨누는 게 그리 자랑스러운 일인가."
백발이 성성한 노도사 하나가 지팡이 대신 검 한 자루를 짚은 채 걸어 나왔다. 걸음걸이는 느긋했지만 눈빛만은 매서웠다. 그 뒤로는 삭발한 청년 승려가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는데,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합장한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강룡이 창끝을 노도사에게로 돌리며 물었으나, 노도사는 태연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강현도라 하네. 그리 무섭게 볼 것 없어. 그보다 자네들 발밑을 좀 보게."
그 말과 동시에, 강룡과 강호의 발밑에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이게 뭐...!"
두 사내가 놀라 뒷걸음질치자,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짐승의 형체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형체는 흐릿했지만, 그 눈만은 붉게 타오르듯 선명하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하다린을 뒤로 감쌌다.
"산신에게 함부로 함정을 놓아 짐승을 잡아들이니, 그 원한이 자네들 뒤를 밟고 있었던 것이지."
강현도가 검을 살짝 들어 바람을 가르듯 휘두르자, 낮게 읊는 도문의 구결과 함께 검신에서 희미한 청광이 번뜩였다.
- 스아아아...
검은 안개가 서서히 흩어지며 사라졌고, 두 사내는 그제야 안색이 창백해진 채 무릎을 꿇었다. 강룡의 손에서 창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고, 강호는 두 팔로 제 몸을 감싸며 몸을 떨었다.
"모, 몰랐습니다. 저희는 그저..."
"알았으면 됐네. 앞으로는 산신께 제를 올리고 함정을 놓게."
강현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털며 돌아섰고, 그 태연한 뒷모습에 나는 오히려 더 큰 경이를 느꼈다.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무릎을 꿇은 두 사냥꾼의 표정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승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묵진이라 합니다. 두 분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얼떨결에 예를 갖추며 답했다.
"백하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청풍문 소속 이서하이고, 이쪽은 여동생 하다린입니다."
"청풍문..."
강현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훑어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다시 위로. 마치 내 몸속에 뭔가 숨겨져 있는 걸 찾으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지만, 곧 그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묘하게 인연이 겹치는군. 우리도 백하성으로 가는 길인데, 함께 가는 것도 괜찮겠어."
"저희야 감사하지요."
나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사흘 밤을 산속에서 지내며 몸으로 배운 것이 있다면, 낯선 산길에서 든든한 동행이 얼마나 귀한지였다.
하다린이 그제야 안도한 듯 상자를 품에서 살짝 풀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 이 아저씨들 좀 멋있어."
[목소리 낮춰. 예의 좀 지키고.]
전음으로 나무랐지만, 정작 나 역시 방금 본 도력에 감탄하고 있었다는 걸 굳이 티 내지는 않았다. 검신에서 번뜩이던 그 청광, 그리고 순식간에 흩어진 검은 안개. 청풍문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경지였다.
강룡과 강호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사죄한 뒤 숲 안쪽으로 사라졌고, 우리는 다시 산길을 걸었다. 걸으면서 묵진이 조용히 내게 다가와 물었다.
"짐이 무거워 보이십니다. 조금 나눠 들어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거절했지만 묵진은 이미 내 짐 한쪽을 슬며시 넘겨받고 있었다. 승려답게 손길이 정갈했고, 힘도 상당했는지 짐을 든 발걸음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강현도가 낮게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저 녀석은 원래 그래. 남 짐 나눠 지는 걸 수행의 일환으로 여기거든. 자네도 사양하지 말고 받아두게."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짐 하나를 마저 넘겼다.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자, 걸음도 조금 빨라졌다.
산길은 여전히 험했지만, 넷이 되어 걷는 길은 확연히 달랐다. 강현도는 걸으면서도 도문의 옛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놓았고, 그 속에는 능청스러운 농담이 섞여 있어 하다린이 몇 번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묵진은 말은 적었지만, 하다린이 발을 헛디딜 때마다 조용히 손을 뻗어 잡아주었다. 그 손길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나는 문득 이 사람들이 처음 본 낯선 이들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밤이 되면 강현도가 작은 부적 몇 장을 사방에 붙여 짐승과 요기를 물리쳤고, 그 덕에 처음으로 발을 뻗고 편히 잠들 수 있었다. 모닥불 앞에서 묵진이 나눠준 마른 과자를 씹으며, 하다린은 상자를 무릎에 올려둔 채로도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그 앳된 얼굴을 바라보던 강현도가 낮게 중얼거렸다.
"참 곤히 자는군. 저 상자가 무언지 궁금하긴 하네만, 굳이 묻지는 않겠네."
나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아직은 말할 수 없는 사정이었으니까.
그렇게 넷이 된 우리는 다시 길을 재촉했고, 사흘 뒤 마침내 저 멀리 백하성의 성곽이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그 윤곽을 드러냈다.
성벽은 오래되어 이끼가 켜켜이 앉아 있었고, 그 위로 낮게 깔린 안개가 성문의 형체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성문 앞에는 낡은 방(榜)이 붙어 있었는데, '요괴 퇴치 의뢰, 보상 후하게 지급'이라는 문구 아래 관아의 인장이 선명했다.
"저거네요."
나는 방 앞에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엿새 밤낮을 걸어온 끝에 마주한 목적지라는 생각에, 발바닥의 통증도 잠시 잊혔다.
하지만 그 방 아래, 이미 낯선 무리가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도포를 걸치고 삼각눈에 독수리 부리 같은 코를 가진 중년 도사 하나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린 채 방을 뜯어내고 있었다. 도포 자락이 바람에 부풀 때마다 은실로 수놓인 문양이 번뜩였고, 그 뒤에 늘어선 제자들의 눈빛에는 하나같이 오만함이 서려 있었다.
"이건 이미 우리 장생문(長生門)이 접수했다. 다들 물러서라."
그 오만한 목소리가 성문 앞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고, 몇몇은 아예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강현도가 미간을 좁히며 낮게 중얼거렸다.
"저자는... 사우량이군."
그 이름을 뱉는 목소리에는, 뭔가 익숙한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방금까지 능청스럽게 웃던 노도사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강 도사님, 저 사람을 아십니까."
묵진이 낮게 물었지만, 강현도는 대답 대신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삼각눈의 도사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마치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