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하 변경백가의 훈련장은 이른 아침부터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서연은 대도의 손잡이를 고쳐 쥐며 짚으로 만든 인형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번, 두 번. 인형의 목이 뭉텅 잘려 나가는 데는 세 번째 휘두름도 필요 없었다. 잘린 짚단이 허공에서 흩어지며 아침 빛 속에 잠깐 반짝였다가, 흙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오늘도 대단하십니다, 영애님."
뒤에서 지켜보던 기사가 혀를 내둘렀다. 서연은 대도를 어깨에 걸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별것 아니라는 태도였는데, 실은 그 별것 아닌 태도가 문제였다.
"별것 아니에요. 인형이 약한 거지."
"인형도 인형 나름이죠. 저건 3년 전에 남부에서 잡은 마수 가죽으로 만든 겁니다."
"그래서 약하다는 거예요."
기사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러섰다. 서연은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다음 인형을 향해 걸었다. 훈련장 한쪽에는 이미 목이 잘린 인형 다섯이 나란히 눕혀져 있었다. 오늘 아침 것만 그 정도였다.
청하는 왕국의 최전선이었다. 마수가 국경을 넘는 날이면 병사보다 먼저 검을 뽑아야 하는 게 이 가문의 당주였다. 그래서 청하 변경백가에는 오래된 원칙이 하나 있었다.
강한 자가 가문을 잇는다.
이 원칙 때문에 지난 백 년간 가주가 무려 세 번이나 형제자매 사이에서 뒤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사소한 시비로 검을 맞댔다가 순위가 갈린 경우도 있었고, 다른 하나는 마수와의 싸움에서 누가 더 많은 목을 베었느냐로 결정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냥 형이 동생보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훈련을 게을리했다는 시시한 이유였다.
서연에게는 남동생 이서준이 있었지만, 세 살 때 마수의 발톱에 팔이 찢겨 검을 쥘 수 없게 된 뒤로 후계 문제는 자연히 서연에게로 넘어왔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두고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연의 손에 목검을 쥐여 주었을 뿐이다. 서연이 그 목검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가 다섯 살이었으니, 벌써 십수 년째 이 훈련장에서 아침을 맞고 있는 셈이었다.
그랬는데.
오늘은 훈련장에 낯선 손님이 서 있었다.
제3기사단의 문양을 단 남자였다. 금발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지나치게 눈부셨고, 자세는 흠잡을 데 없이 단정했다. 갑주는 실전에서 쓰인 흔적이 뚜렷했는데도 광이 나도록 손질되어 있었다. '누구지.' 서연은 대도를 바닥에 짚으며 남자를 훑었다.
주변 기사들이 슬금슬금 훈련을 멈추고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낯선 남자 하나 때문에 훈련장 전체가 이렇게 어수선해지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서연 영애."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지만, 눈빛에는 서연이 알 수 없는 확신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강도현입니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를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서연은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마수도 안 놀라는데 사람 하나에 놀랄 이유는 없었다.
"저와 혼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훈련장의 소음이 순간 뚝 끊겼다. 짚 인형의 잘린 목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렸다. 누군가의 목검이 손에서 미끄러져 흙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도 뒤이어 났다. 서연이 아니었다. 뒤에서 구경하던 신참 기사였다.
서연은 눈을 두 번 깜박였다. '지금 나 말고 다른 이서연이 있는 건가.' 그런 생각까지 잠깐 스쳐 지나갔다. 이 왕국에 이서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더 있는지 세어보려다가, 그마저도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고 그만두었다.
"저희, 초면인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혼을 하신다고요."
"네."
대답이 너무 짧고 단호해서 서연은 오히려 말을 잃었다. 옆에 있던 기사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슬쩍 물러섰다. 누구도 이 상황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얼굴들이었다. 조금 전까지 서연의 실력에 혀를 내두르던 기사조차 지금은 땅바닥의 짚 인형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 인형이 대신 대답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서연이 겨우 물었다.
도현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아주 잠깐, 뭔가를 삼키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뭐야, 그건.' 서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유도 없이 청혼이라니, 이건 예의가 아니라 무례에 가까웠다. 결혼이라는 게 무슨 훈련장에서 대충 인형 목을 치듯 즉석에서 결정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도현의 눈빛에는 장난기나 계산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진지해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아니, 진지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지금 이 순간, 도현은 마치 전투에 나서는 병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혹시 저희 가문 재산 때문이라거나."
"아닙니다."
"제 검술이 소문이 나서라거나."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뭔데요."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서연은 이마를 짚었다. 대화가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이유는 없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솔직했을 것이다.
서연은 대도를 다시 어깨에 걸쳤다.
"기사님, 저는 지금 훈련 중이었습니다. 답은 나중에 드리죠."
"기다리겠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말속에 담긴 각오는 결코 짧지 않았다. 서연은 등을 돌리며 생각했다. '이 남자, 뭔가 사정이 있구나.' 그리고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 사정이 무엇인지 알기까지는, 서연도 몇 가지 소동을 더 겪어야 했다.
***
그날 저녁, 서연은 서재에서 아버지 앞에 앉아 있었다. 서재의 벽난로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채였고, 창밖으로는 훈련장의 흔적이 어스름 속에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종일 밀린 서류더미를 앞에 두고 미간을 좁힌 채였는데, 서연이 들어와 낮에 있었던 일을 전하자 그제야 서류에서 손을 뗐다.
"제3기사단의 강도현이라고 하면." 아버지가 서류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작년 북부 국경에서 마수 무리를 단독으로 막았다던 그 기사 아니냐."
"아버지도 아세요?"
"기사단에 이름 좀 알린 이들은 대부분 알고 있지.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우리 집 훈련장까지 찾아와서."
"그런 사람이 왜 저한테 청혼을 합니까."
"글쎄다." 아버지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
"초면에요?"
"세상에 별종은 많다."
"저는 그 별종 목록에 넣지 말아 주세요."
"이미 넣었다."
서연은 그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도 스스로가 별종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검을 든 여자 후계자라는 것부터가 이 왕국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혹시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세요? 저희 가문이랑 무슨 얽힌 일이 있었나요."
"강씨 가문이면." 아버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얽힌 일은 없다. 애초에 그쪽은 몰락한 지 오래된 기사 가문이야. 지금 강도현이라는 그 청년이 혼자 실력으로 제3기사단까지 올라간 걸로 알고 있다."
"그럼 정말 저를 보고 마음에 든 거란 말이에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겠지. 세상엔 별별 사정이 다 있으니까."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오히려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살짝 스쳤는데, 서연은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 지금 재밌어하시는 거예요?"
"아니다."
"눈이 웃고 있는데요."
"착각이다."
밤이 깊도록 서연은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방문 밖에서는 시녀가 등불을 끄며 지나가는 발소리가 났고, 창밖으로는 훈련장 쪽에서 늦게까지 무기를 손질하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유도 안 밝히고 청혼이라니.'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도현의 진지한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그 눈빛이 자꾸만 눈앞에 되풀이되는 게, 서연 스스로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말씀드리기 어렵다니, 대체 뭔데.'
서연은 이불을 걷어차며 몸을 돌려 누웠다. 벽에 걸린 대도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마수를 상대할 때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마음이, 지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꾸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