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8000시간, 1021개 직업

1화

새벽 세 시. 편의점 창문에 내 얼굴이 비쳤다. 푸석한 낯빛이었다. 눈 밑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스물아홉 살, 백수, 알바 삼일차. 야간 조는 시급이 세다고 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손님이 뜸한 시간이었다. 형광등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낯선 남자였다. 캔 하나를 계산대에 올려놓더니, 옆에 있던 다른 캔을 하나 더 꺼냈다. "이거 서비스로 드릴게요." 낯선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눈매가 유독 선명했던 게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편의점 알바생한테 손님이 뭘 준다는 것부터가. 그런데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피곤했으니까. 야간 알바 사흘 만에 사람이 반쯤은 맛이 가 있었으니까. 나는 별생각 없이 받았다. 캔을 땄다. 한 모금 마셨다. 목이 이상하게 뜨거웠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뜨거운 게 아니라 뜨겁다 못해 저릿했다. 두 번째로 마시려고 캔을 들었을 때, 손이 말을 안 들었다. 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다음은 기억이 끊겼다. 엄마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던 것 같다. "밥은 먹었어?" 항상 똑같은 그 말. 전화할 때마다, 만날 때마다, 헤어질 때마다 하는 그 말. 나는 대답을 못 했다. 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숨이 막혔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발끝부터 뭔가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빛도, 소리도, 감각도.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나무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지붕이었다. 흙과 짚을 섞어 바른 천장이었다. 내가 살던 원룸의 몰딩 천장이 아니었다. 손을 들어봤다. 작았다. 손등에 상처 하나 없었다. 내 손등에는 배달 사고로 생긴 흉터가 있어야 했다.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가벼웠다. 관절이 시큰거리는 느낌도 없었다. 스물아홉 살의 몸이 아니었다. [대상 확인: 이하준] [연령: 16세] [상태: 정상] 눈앞에 글자가 떠 있었다. 허공에. 색은 파랗고, 폰트는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손을 뻗어봤다. 글자를 만질 수는 없었다. 만져지지 않는데 분명히 거기 있었다. 나는 알았다. 이 화면을. 8000시간 넘게 봤던 화면이었다. 〈던전 취업 추천〉. 대학 시절부터 붙잡고 있던 게임이었다. 1021개의 직업 중 하나를 골라 던전을 클리어하고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는 게임. 현실에서는 백수였고, 게임 안에서는 랭커였다. 그게 내 자랑이었다. 랭킹 서버 상위 100위 안에 들었을 때, 나는 진짜로 웃었었다. 취업 면접에서 백 번쯤 떨어졌을 때는 웃지 못했는데. 그런데 지금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손을 움직이면 진짜로 움직였다. 숨을 쉬면 진짜로 폐가 부풀었다. 손끝으로 내 팔을 꼬집어봤다. 아팠다. 진짜로 아팠다. "이게 뭐야." 내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어린 목소리였다.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은, 가늘고 높은 목소리. [선택하십시오.] [1021개의 직업 목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글자가 다시 떠올랐다. 동시에 목소리가 들렸다. 귀가 아니라 머리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선택해." 짧고 단정적인 말투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방 안에는 나 혼자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에 부셨다. "누구야." "질문은 나중에." 목소리가 곧바로 되받아쳤다. 감정이라는 게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다. 데이터를 읽는 것 같았다. 기계음처럼 건조했다. "1021개 중에 하나. 지금 골라." "조건이 뭔데." "조건은 네가 알아내야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게임에서는 이 시점에 튜토리얼 설명이 붙었다. 초기 직업을 고르면 스탯 배분이 정해지고, 그 스탯이 평생 캐릭터의 성장 곡선을 결정한다. 초보자 대부분은 여기서 실수한다. 화려한 이름의 직업, 강해 보이는 직업을 고른다. '검성', '마도사', '용기사'. 그리고 100시간 안에 접는다. 성장 곡선이 초반에만 반짝하고 후반부에 죽는 빌드였으니까. 나는 알고 있었다. 진짜 답은 화려한 것 안에 없었다. 수천 번의 리셋과 수백 개의 공략 글을 읽으며 얻은 결론이었다. "직업 안 고르면 어떻게 되는데." "손해." 목소리가 짧게 대답했다. "보상이 사라져." "어떤 보상." "시장에서 먼저 들어간 사람이 먼저 먹는 거야." 은유였다. 주식 시장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선점 효과, 초기 매수자의 이득. 나는 등에 땀이 배는 걸 느꼈다. 손이 떨렸다. 이 목소리가 나를 압박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빨리 고르라고, 남들 다 고른다고. 게임 초반 튜토리얼에서 흔히 쓰는 유저 유도 심리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게임 안에서 진짜 최강 빌드는 '무직'이었다. 초기 직업을 아예 받지 않고, 특정 조건을 채우면 열리는 히든 클래스. 이름조차 목록에 없는 직업. 공략 커뮤니티에서도 열 명 중 아홉은 존재조차 몰랐던 클래스. 나는 그걸 노리고 8000시간을 썼다. 캐릭터 세 개를 삭제하고 처음부터 다시 키운 적도 있었다. "나 직업 안 고를래." "손해 본다고 했잖아." "알아." "후회 안 해?" "안 해." 짧은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목소리가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임시 직업으로 등록한다." 목소리가 말했다. [직업: 무직 (임시)] [상태: 대기 중] 글자가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몸이 가벼워졌다. 동시에 뭔가 하나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가슴 한복판이 텅 빈 것 같았다. 원래 있어야 할 뭔가가 없어진 느낌. 그런데 그게 뭔지 짚어낼 수가 없었다. "뭐 빠진 거 있어?"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목소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허공에 떠 있던 글자들도 함께 사라졌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발소리였다. 문이 열렸다. 나무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구나." 나이 든 남자가 서 있었다. 수염이 희끗한, 눈매가 깊은 남자였다.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어깨가 단단해 보였다. 손에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었다. "당신 누구예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박덕수. 이 마을 촌장이다." 그는 나를 뜯어보듯 쳐다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상품을 감정하는 눈빛으로. "넌 사흘 전에 숲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 사흘. 나는 그 숫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죽고, 다시 눈을 뜨는 데 사흘이 걸렸다는 뜻이었다. 그 사흘 동안 이 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숲에서, 이름 모를 소년의 몸으로, 홀로 쓰러져 있었다는 것. 그 앞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기억도 없었다. "기억나는 게 있나?" 박덕수가 물었다. 목소리가 낮고 무뚝뚝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잡히지 않았다. 느껴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을 더듬어봤다. 편의점, 캔, 낯선 남자. 거기까지는 또렷했다. 그 이후는 안개였다. 숲, 쓰러짐, 사흘. 그 사이의 시간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몰라요. 아무것도." 박덕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당연했다. 기억을 잃은 아이가 숲에서 발견됐다는 것부터가 수상할 만한 이야기였으니까. "이름은 기억하나?" "이하준이요." 내 입에서 그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 몸의 이름이었다. 내 이름이 아니라. 그런데 이상하게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박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을엔 하준이라는 아이가 없었다."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떠돌던 아이거나, 숲 너머 다른 마을에서 온 아이겠지." 그가 팔짱을 꼈다. "당장은 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여기서 신세 좀 지겠나." 창밖으로 낯선 마을의 풍경이 보였다. 지붕이 낮고, 흙길이 좁았다. 닭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던전 취업 추천〉의 시작 지점, 무명촌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수백 번 지나쳤던 튜토리얼 마을.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진짜다. 내 몸이 여기 있고, 내 숨이 여기서 쉬어지고 있다. 빠져나간 그 무언가가 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이 게임의 규칙이 예전과 똑같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이 마을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무직이라는 텅 빈 이름표를 달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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