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갔다.
유풍학원의 담장 안에서 계절은 그렇게 무심히 흘렀다. 매화가 지고 나면 목련이 피었고, 목련이 지고 나면 신록이 우거졌다. 이청은 그 변화를 몸으로 겪으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말수를 되찾아갔다.
아침이면 소은이 어김없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가벼운 노크 소리였지만 이청에게는 그것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다. 문을 열면 소은이 특유의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고, 둘은 함께 후원을 걸으며 학원의 이곳저곳을 익혀 나갔다.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풀잎을 밟을 때마다 서걱이는 소리가 났다. 아침 공기는 서늘했지만,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사이에는 온기가 흘렀다.
"저, 저기 저 전각은 백기(白旗) 처소예요." 소은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조, 조엄관 원장님이 계신 곳인데… 되, 되게 무서워요."
"무섭다니?"
이청의 물음에 소은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저, 저번에 흑기 애들한테 뭐라 그랬거든요. 저, 저자질 애들은 학원에 못 들어온다고… 그, 그때 저는 문밖에서 보기만 했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이청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자질(低資質)이라는 말이 자신을 겨냥한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멀리 백기 처소의 전각 지붕이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
실제로 백기 처소의 조엄관은 학원 안에서 이청에 관한 소문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
그는 서안 앞에 앉아 보고서를 읽으며 미간을 좁혔다. 창밖으로 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경맥이 셋이나 막혀 있다고?" 그가 부관에게 되물었다. 붓끝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췄다.
"예. 흑기 원장이 데려온 아이인데, 태생 불명입니다." 부관은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본래대로라면 입학 자체가 불가한 상태였으나, 흑기 원장의 재량으로 예외가 허락되었다 합니다."
조엄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재량이라." 그가 낮게 되뇌었다. "학원의 규율이 한 사람의 재량으로 흔들려서야 되겠는가. 태생 불명의 아이를 함부로 학원에 들이다니. 원장께 다시 한번 말씀드려야겠군."
그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부관은 그 냉기에 눌린 듯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었나."
"이청이라 합니다."
"이청…" 조엄관은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리듯 되뇌었다. 그러고는 서안 위의 보고서를 손끝으로 툭 밀어냈다. "지켜보아야겠다. 셋이나 막힌 경맥으로 이 학원에서 무엇을 이루겠다는 것인지."
부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방 안에 감도는 냉랭한 기운만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
그날 밤, 이청은 잠들지 못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유난히 차가웠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별빛마저 서늘하게 반짝였다. 자리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던 이청은 문득 방 안 공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서늘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였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끝이 저절로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공기의 결이, 평소와는 분명히 달랐다.
스륵―
창호지에 그림자 하나가 비쳤다. 사람의 형상이었지만, 윤곽이 흐릿하게 일렁였다. 마치 물속에 잠긴 그림자를 보는 듯했다.
이청은 숨을 죽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과,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동시에 그를 짓눌렀다.
그 순간, 품속에 지니고 있던 목함에서 은은한 열기가 번져 나왔다.
뜨거웠다. 손바닥이 델 것처럼.
이청은 반사적으로 목함을 끌어안았다. 그림자는 창호지 너머에서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가늠하듯, 느릿하게.
서걱―
창호지가 찢어지며 검은 손이 뻗어 들어왔다. 손가락 끝은 인간의 것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길고 마디가 굵었다. 이청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몸을 뒤로 물렸다.
그 순간, 목함 안의 청록빛 영액이 파도치듯 요동쳤다.
빛이 새어 나왔다. 은은하던 것이 순식간에 밝아지며 방 안을 청록빛으로 물들였다. 소년의 팔뚝을 타고 낯선 기운이 흘러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뜨겁고, 시리고, 동시에 온몸이 떨렸다.
"…뭐지?"
이청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물음이 새어 나왔다. 답을 찾을 새도 없이, 그 기운은 이미 그의 팔을 타고 어깨까지 번져가고 있었다.
검은 손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마치 무언가에 데인 것처럼, 손가락 끝에서 옅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치익―
그림자는 창밖으로 흩어지듯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희미한 탄내와, 방 안 가득했던 청록빛 잔광뿐이었다. 그것마저 서서히 잦아들었고, 방 안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청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목함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은은한 온기를 품은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놓여 있었다.
"…네가, 나를."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목함 속의 그것이, 자신을 지켜 주었다는 것.
이청은 그날 밤 다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찢어진 창호지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이, 그 밤따라 유난히 서늘했다.
***
다음 날 아침, 손이화는 창호지가 찢긴 자국을 발견하고 낯빛이 굳었다.
그녀는 방문 앞에 선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찢어진 자리를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날카로운 것에 찢긴 흔적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에 태워진 듯, 가장자리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이청의 방을 한참 살폈다. 바닥을 훑고, 창틀을 살피고, 마지막으로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청은 목함을 품에 안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운 얼굴이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손이화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억누른 긴장이 배어 있었다.
이청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목함을 더 세게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그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겨우 짜낸 말이었다.
손이화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찢어진 창호지, 겁에 질린 소년의 얼굴, 그리고 소년이 놓지 못하는 저 목함까지.
그녀는 그것이 예삿일이 아님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 목함을." 손이화가 낮게 말했다. "잠시 보여다오."
이청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목함을 감싼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손이화는 더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시선은 오래도록 그 목함에서 떠나지 않았다.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찢어진 창호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서늘한 바람이었다. 마치 지난밤의 냉기가 아직 방 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